신앙의 도: 태적인 사랑 Way of faith: Love’s Womb
구절: 고린도 전서 First Corinthians 13장 7절, 11절 알렉스 박 소장 동서 성경 연구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erseveres." (NIV) 11절: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벌였노라.""When I was a child, I talked like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childish ways behind me." (NIV) 사도 바울의 고린도 13장은 유명한 사랑의 장이라고 알려졌습니다.너나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사랑을부르짖고, 찾고, 애걸하고 또한 노래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삶을 둘러보면 결핍된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사랑이 찾아보기 힘들까요? 이유는 태( womb)와 따스한 사랑 (warm kindness)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헬라어로 사랑은 약 4가지로 표현합니다. 아가페 (Agape), (Phileo), 스톨게 (Storge), 에로스 (Eros). 2000년 전 이미 헬라 철학개념 속에서는 이러한 사랑에 대한 표현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랑의단어들을 서로 교환(interchangeable)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가 생겨나면서 사랑의 대한 단어들에 구분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아가페는 영적인 조건 없는 사랑이면, 필레오는 형제간의 사랑, 스톨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에로스는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으로구별합니다. 신약에서는 스톨게와 에로스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분 가운데에서도 사도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은 이러한 헬라어의 구분을 교환적으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서 13장의 주제인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곧 영적인 사랑,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아가페와 필레오를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레오 (형제적 사랑) 하신다고 요한복음 16 : 27절을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 장 15~17절에 부활 후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아가페와 필레오였습니다 헬라어로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질문하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에는 필레오로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일관적으로 세 번 다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로 쓰이기도 하고 필레오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헬라어 외에 시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어는 아람 방언중에 하나로써 고대 히브리어도 아람 방언도 이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모두는 시리아어가 모태 어였습니다. 헬라어는 국제어였습니다. 아람어 방언인 시리아어에서도 사랑이라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시리아 성경인 페쉬타 Peshitta를 보게 되면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어로 사랑을 "후바 (Huba)와 "라훔" 또는 "레흠" (Rahum/rehum)"라고 표현합니다. "후바"의 의미는 열렬히 타는 불, 따스함, 양선, 또는 친절 (Flaming fire; warm, kindness)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훔"의 의미는 자궁, 모체, 또는 태 (matrix, womb)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복음서 저자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랑을 표현할 때 "후바" (따스함) "레흠"(태) 사랑을 사용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사랑을 "후바"(따뜻함) 으로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서 16장 27 절에 부활 후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레흠" 입니다. 헬라어로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아가페로 질문하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에는 필레오로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나 페쉬타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레흠" (태)적 사랑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들이 구별없이 한글로는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고 영어로는 love로 일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느낌적인 면에 있어서 헬라어 아가페, 필레오보다는 시리아어의 "후바"와 "레흠"으로 이해하면 이 구절들이 더욱 친절하게 와 닷습니다. 사도바울 또는 복음서 저자들이 말하는 사랑은 "레흠"태 (womb)적 사랑, "후바"따스한 (warm, kind) 사랑을 말합니다. "레흠"의 뜻은 자궁 (womb)이라는 뜻으로서 아기가 엄마의 태에서 있는 상태를 "레흠"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리아어로 사랑은 그냥 태에 자라는 아기가 안전하고 편안하고 따스하고 평화스러운 상태를 말해 줍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태속에 품고 있는 것처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가페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사랑이고 또한 필레오 사랑도 베드로가 고백했으나 실천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레흠"의 사랑은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가 산모의 마음과 태적의 사랑을 소유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후바," "레흠"적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 하고 또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희생과 고난이 따라 올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산모가 아기를 잉태할 때에 모든 것을 참고,믿고, 바라고 견디듯이, 크리스천도 이렇게 살아야 하며, 아기가 태에서 안전하고 편하고 따뜻하게 자라듯이 우리도 임신한 엄마처럼 "레흠"사랑을 가지고 이웃과 원수들을 편안하게해주며 안전하도록 또한따스하고 평화롭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님니다. 성경에서는 해산의 고난과 고통을 죽음을 각오한다고 말 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임신도 없고, 해산의 고통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헬라어 사랑 (아가페)란 단어를 기록하면서 그의 생각에는 아람어의 의미 "후바"또는 "레흠"적 사랑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7절에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고 견딘다는 뜻은 희생과 고난을 품고 상대방을 "레흠" 또는 "후바"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을 태 (레흠)에 있는 아이처럼 품고 따스하게 (후바) 사랑을 해 주라는 뜻입니다. 성숙한 크리스천들은 11절에 나오는 어린아이 처럼 남아있지 말고 성숙한 산모처럼 이웃과 원수를 품고, 참고, 믿고, 견디는 자들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한글또는 영어로 묘사된 사랑 (love)으로 만 읽더라도 우리는 사랑을 이해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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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Brother Alexander T. Pak has a doctorate in Patristics, which he studied under Dr. Joseph P. Farrell (Oxon) and Dr. Scott DeHart (Oxon), from CGSOT. He focuses on researching Church Fathers, Korean-American immigrant history, and missions. Martyr's Descendant: A Story of Vowed Son was published in the spring of 2019 and was his autobiographical novel that tells of how he found himself. Archives
Jul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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