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계몽주의와 해방
The Enlightenment and Freedom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18 세기의 유럽 지성주의 혁명이었다. 계몽주의의 시초자는
베네딕 스피노자(Benedict Spinoza, 1632-1677)였다.1 그는 암스테르담(Amsterdam),
네델란드에서 태어났다.2 그의 본명은 바룩3 스피노자였다. 바룩은 어려서 부터 유대교의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4 그리고 히브리어와 성경과 탈무드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철학과 라틴어를 공부했다.5 그가 영향을 받은 자들은 데카르트(Descartes),
홉스(Hobbes)와 그외에 그당시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6
스피노자는 매우 특이한 철학자였다. 그는 그렇게 많은 성서연구와 탈무드를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 볼때에 그는 무신론자로 보았다.7 그는
암스테담에있는 회당 랍비들에게 혹독한 눈총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1656 년 7 월 27 일
날짜로 회당에서 출교를 당했다.8 그의 죄명은 천사를 부인하는 것과, 영의 불멸을
부인한것과 토라의 신빙성을 부인한것들이었다.9
그는 벌금을 물고 그의 자세를 바꾸라는 랍비들의 말을 거절하였다. 유대교는
스피노자에게 벌금 1,000 플로린을 부과시켰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벌금 내는 것을
거절하였다.
스피노자의 부친이 죽은 후 그는 그에게 상속된 재산정리는 법정관리인에게
맡겼다.10 그리고 그는 방랑생활을 하기 시작했다.11 그는 헤이그(Hague)에 정착하면서
렌즈를 깎는 일을 하면서 그의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12 그는 청빈한 삶과 간단한 삶을
살았다. 한 때는 하이델버그 대학에서 교수직을 권했으나 그것도 거절하였다. 그는 그에게
수여된 모든 상과 명예를 모두 다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를 찾는 이들은 그가 기꺼이
만나주었다. 그리고 그는 서신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전하기도 하였다. 1677 년에
스피노자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안경렌즈를 깎는 먼지로 인해
결핵에 걸려목숨을 잃은것으로 주장하고 있다.13 그가 죽은 때에 그의 나이는 45 세였다.
스피노자의 공헌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죽기전에 남긴 책은 “A Treatise on
Religious and Political Philosophy”였다.14 이 책의 중심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후에 출판된 책들은 도덕에 관한 것이었다.15
스피노자의 도덕관은 이러하다. 그는 전통적인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그는`하나님이 모든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였으며 반대로 `모든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16 스피노자의 주장은 `선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17 스피노자는 또한
열정과 두려움 대신에 자유를 주장했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주장했다.18 스피노자의
독립적인 생각은 획기적인것이었다. 전에는 모든것이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에서
시작됐었으나 스피노자의 독립적인 생각은 중세의 모든 사상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19
스피노자는 전통에 대해 도전한자였다. 그리고 전통에 대한 반발을 들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불러일으킨 사상은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를 펼쳤다. 이성의 시대는
유럽의 사상과 종교 그리고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18 세기에 시작한
계몽주의는 민주주의를 낳았고 세속화에 열기를 더해주었다. 이제는 군중들에게 종교만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독립과 자유에 촛점을 맞추게 해주었다.
계몽주의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럽에 사는 모든 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게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도 유대교를 버렸다. 이러한 세속화현상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는 분명한 선을 그을때가 온 것이다. 세속화 문화와 유대교
문화에서 랍비와 민중간에 마찰이생겼다.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은 세속화되는 유대인과 유대교의
다리 역활을 한 자였다.20 멘델스존은 데사우(Dessau),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랍비의 아들이었으며 보편적인 유대교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세속학문인 그리스어,
라틴어,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멘델스존이 젊었을 때에 그의 친구중에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레싱(Gotthhold Lessing) 들이 있었다.21
1750 년에 독일 황제 프레드릭대제는 멘델스존에게 아무곳에서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그래서 그는 베를린(Berlin)에서 정착해서 살았다. 레싱은 멘델스존이
책을 출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책의이름은 ‘현자 나단’(Nathan the Wise) 이였다. 이
책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인본주의 사상과 보편주의자가 되도록 격려했다. 그리고 그를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렀다.22
멘델스존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양자택일”에서 두 가지를 다 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방의 철학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또한 유대교에서도
존중을 받는 자였다.23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은 멘델스존을 모델처럼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유대인들이 겟토(Ghetto)에서 나와서 주류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멘델스존의 사상에서 한 유대교파가 태어났다. 하스칼라 (Haskalah)24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넓게는 유대교의 계몽운동이었으며 좁게 해석하며는 유대학문의
발전운동이었다. 하스칼라의 중심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주류사회의 문화를 입고 사회에
공헌을 하는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하스칼라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각 곳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과서를 히브리어로 써서 후계자 양성에도 이바지했다. 하스칼라의 정신은
프러시아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까지 퍼져나갔다. 멘델스존과
하스칼라운동은 겟토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과 길을 열어주었다.
프랑스혁명(1789-1799)은 유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혁명은
프랑스인들과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나은 삶을 가져다 주기를 바랬다. 혁명 이후에
공포 시대(Reign of Terror)가 뒤따랐지만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긍정적인 시기였다.25
프랑스 국회에서 인권선언을 통과시켰다. 인권선언의 핵심은 모든 자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모든 사람들은 자유하며 또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는
두 번째 선언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두 번째 선언은
많은 반대들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2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전 유럽 켐페인은
유대인들에게 많은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군인들이 가는 곳 마다 유대인들을 선대하였다.
그리고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안에서 만은 유대인들에게 대해서 호의적이
못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나폴레옹때 유대인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설도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 년도 자신을 전 프랑스의 총독(Consul)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5 년이 지난 후 그는 황제(Emperor)로 자칭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안 제국을 정복하고, 그후에 이탈리아와 러시아지방을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 유럽의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같이 동등한 위치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뜻이 현실화되려면 유대인들이 고집을 버려야만 가능했다. 유대인들은
민족성을 주장하고 유대교를 끝까지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다른민족과
하나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산헤드린공회(Great Sanhedrin)를
열었다.27 여기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유대교 대표자들은 황제의 간청을 듣고서
결정을 내려야만했다. 그러나 유대교를 버리는것은 말도 안됐다. 산헤드린공회는 별다른
결과없이 끝을 내었다.28 다만 대표자들은 나폴레옹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프랑스의 시민권을 박탈당하지 않을 정도로 유대인들의 전통을
간직했다. 나폴레옹과 공회의 결과는 합리적인 상태에서 끝났다.29
산헤드린공회가 마친 후에 나폴레옹은 두 가지 칙령을 내렸다. 하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일들은 유대인 공회에서 처리할것과 두번째로는 유대인들에게 지은 빚은
탕감하거나 그 액수를 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혁명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혁명후 4 년만에 프랑스와 독일의 유대인 겟토는 사라져 버렸다. 유대인들이 홀랜드에
정착한 시대는 중세시대로 본다.30 1796 년도에 홀랜드(Holland)는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프러시아(Prussia)는 1812 년에 같은 혜택을 주었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혜택을 베풀었지만 시민들 사이의 차별은
없어지지 않았다. 다시말해서 반유대주의는 유럽대륙에 항상 남아있었다.
독일은 300 도시들이 모여서 비엔나국회(Vienna Congress)를 설립하여 39 주를
세웠다. 그리고 이 주들은 옛날 독일의 정신과 전통을 다시 살리려고 했다. 그리고
독일계들이 아닌 민족들을 학대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대인들은 “아시아족”으로 칭해
이들을 더욱 괴롭혔다. 1830 년도에 관용한 법이 통과 되어서 유대인들의 핍박이
멈추었다. 그리고 18 세기때에는 독일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동등한 권위를 주었다.
이탈리아(Italy)에서도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은 있었으나 1848 년도
토스카나(Tuscany)와 살디니아(Sardinia)지방에서 유대인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다른 이탈리안 도시들도 같은 법을 정했다. 그리고 1870 년경에는 온 이탈리아가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스위스에사는 유대인들은 1874 년까지 기다려야만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1918 년에 시민권을 받았다.
이제 유대인들에게 기회의 문이 열린이상 이들은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아가면서 이들이 사는 나라에서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많은
분야에서 이들의 우수성을 나타내었다. 유대인들이 사는 유럽은 여러분야에서 두곽을
나타내었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새로운 자유와 기회가 주어졌다. 여러 세대를 지나서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각종 전문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많은 과학자들과, 예술가, 공예가와
사업가들이 나왔다.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교를 간직한 자들도 있었으며 또한 많은 자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후세에 가서는 이러한 종교를 개종하는
현상이 더 뚜렷했다. 타 종교로 개종하는 원인은 대개 차별과 진급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항상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볼때에 유대인들은 어떤 민족에 비해도 이들은 항상 상위권에 들어있었다.
여기에 유대인 또는 인류에게 영향을 준 유대인들을 소개한다.31
공 모세 퐁테피오레(Sir Moses Montfiore, 1784-1885) 는 영국에서 증권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서 치안관을 맡았으며 그는 영국에서 기사(Knight)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은퇴한 후에 그의 시간과 재산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사용하였다.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그곳에 학교와 병원을 설치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에 그는 유대교인이 되었다. 그의 나이 백세되는 때에는 온
세계 유대인들이 축하했다.
벤쟈민 디즈레일리 (Benjamin Disraeli, 1804-1881)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유대인의 배경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디즈레일리의
부친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였고 나중에는 영국의 성공회(Anglican) 교인이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으며 또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많은
책들도 썼으며 또한 정치인으로서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869 년에는 영국에 보수파를 조직하고 그가 당의 총수가 되었다. 그리고 영국에
국무총리도 맡았다. 그는 1874 년도에 다시 수상이 되어 6 임기까지 있었다.
거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말러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와 지휘자였다. 그는
부다페스트 임페리얼 오케스트라 (1888-1890), 독일 함버그 극장(1891-1897), 빈
국립오케스트라 (1897-1907),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09-1911)의 지휘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프로이트는 모라비아(Moravia, 현 체코공화국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매우
종교적이었으며 그는 빈에서 정신과의사와 교수로 이름이 났었다. 프로이트는 유대교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학(Psychoanalysis)으로 사람의 억제와 무의식중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의 심리를 읽도록 하는 이론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정신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아인슈타인은 유대계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교를 지키는 유대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종교인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한 일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세계 제 2 차 대전때 있었던 유대인들 대학살(Holocaust)때에
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해 내었다. 그리고 근대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하는데에도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한 때는 아인슈타인을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초청하였으나 그는
공손히 거절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로 알려져있다. 1905 년에 그의
유명한 포뮤라인 상대성이론(Theory of Relativity)을 발표함으로써 근대의 원자력시대를
펼쳤다. 그는 그의 물리학적 업적에 대해서 노벨상(1921)을 받았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철학계에 많은 영향을 준 프랑스 유대인 철학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파리에서 폴란드 유대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1889 년 파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과 저술외에도 많은 사회 봉사를 하였다. 1920 년때는 UNESCO 의 전신인
국제위원회(Commission Internationale of Coopération Intellecualuale)의 의장으로도
있었으며, 국제연맹 (The League of Nations)의 의장으로도 지냈다. 그는 1927 년에 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의 시집으로 문학 부분에서 노벨상을
수여 받기도 했다. 베르그송의 업적은 이성주의와 과학의 이해도 중요하나 개인의 의식적
경험과 감각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로는 박사의 논문인 ‘시간과 자유’ (Time and Free Will, 1889)가 있으며,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 1896), ‘창조와 진화’ (Creative Evolution, 1907) 그리고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The Two Sources of Morality and Religion, 1932)등이 있다.32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95)는 리투아니아의 가우나스지방에서
태어났다. 부모님밑에서 정통적 유대교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교육은 스트라스북대학에서 받았으며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University of
Freiburg)에서후셀(Husserl)의 마지막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30 년
스트라스북대학에서 박사 논문은 ‘후셀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La Théorie de l’intuition
dans la phnéomnéology de Husserl)이다. 그는 제 2 차 세계대전때 프랑스군에서
통역관으로 봉사했다. 그리고 한때는 전쟁포로로 잡혔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후 다시
논문을 쓰고 학계에 발을 붙혔다. 그의 논몬의 주제는 ‘총체성과 무한성’ (Totality and
Infinity, 1961)이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윤리학(Ethics)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는 존재론(Ontology)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타인의 의식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타자(the Other)를 의식하는데서
부터 확신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윤리학은 첫번째 철학이며 윤리학은 타자이다고
말했다. 그는 유대교의 탈무드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히브리성경(오늘날
기독교의 구약임)을 읽으면서 유대교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와 장 프랑수아 리요다르(Jean-Francois Lyotard) 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33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부르셀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와 파리오 이주해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교육을 받았다. 파리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나서는 철학을 공부하였다. 스트로스는 인류학자및 인종학자였다. 그의 사상은
근대 인류학의 시초자로 불리운다. 또한 그는 그의 사상을 구조주의(Structuralism)에
맞추어 펼쳐나갔다.
그는 그의 저서인 ‘야생의 사고’ (The Savage Mind, 1962)를 통해서 인간의
긍극적인 목표는 구조나 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분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양 중심주의 와
인종학의 차별의 벽을 부서뜨렸다. 그의 저서로는 ‘신화와 의미’(Myth and Meaning, 1978),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1955),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 1962)외 많은 책들을
썼다.34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북 아프리카 알제리의 엘 비아르(El-Biar)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스팔르딕 유대인들이었다. 그는 제 2 차 세계대전당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다 퇴학을 당했다. 이유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 반 유대주의
정책이 펼쳐졌던것이다. 그는 이 충격이 일생을 좌우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파리, 벨지움의 루벵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1971 년도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미국의 여러 대학교에서도 강의 를
하였다. 특히 죤 홉킨스 대학, 하바드대학교와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어바인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했다.
데리다의 철학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으로 특히 구조주의를 반대하는
것이였다. 그는 문학, 회화, 정신분석학, 예술, 건축 등외에 모든 구조를 대 검토하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파궤파는 아니였다. 특히 미국내에서 후기 구조주의 반응이였다.
그의 저서로는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 1967), ‘해체’(La dissémination,
1972)등이 있다. 35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변화가 오고있었다. 처음으로 유대인들은 이제 그들의
정체나 종교에 대해서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교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않았다. (어떤 때는 이론적일 때도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자유롭게 이들의 신앙을 간직하고 지킬 수 있었다.
유대교는 고정됐거나 정지된 종교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유대교의 역사를 볼때에 유대교안에서 많은 파들이 생겨났으며 떨어져
나갔다. 예를 들어서, 엣센스파, 바리새인파, 사두개파, 카라스파 그리고 많은
랍비들파들이 유대교를 거쳐갔다.
카라스파는 19 세기 전까지 유대교를 대표했다. 카라스파는 모세율법과 구두로
전해진 율법을 보존하고 지킬것을 가르쳤다.36 그리고 이렇게 유대교를 지킨자들을
정통파 유대교(Orthodox Jews)인이라고 불렀다.
19 세기에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독일계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모양의
유대교가 나타났다. 이들은 격식을 떠난 자발적이고 자진적인 스타일의 예배를 도입했다.
새로운 유대교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와 현실에 맞는 상황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독일계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차이를 두지않았다. 이러한 변화를
주장한 유대교인들을 “개혁유대교 (Reform Jews)”라고 부른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와
현재에 필요한 형식을 도입한 유대교인들이다.37
첫번째 생긴 개혁유대교 회당은 1810 년에 이스라엘 야곱손(Israel Jacobson)에 독일
웨스트필리아에 세워졌다. 그리고 1818 년도에는 독일 함버그 도시에 또 하나의 개혁
유대교회당이 세워졌다.
개혁 유대교의 통합은 나중에 생겨난 일이다. 베를린에서 사무엘 홀드하임(Samuel
Holdheim, 1806-1860)에 의해서 개혁유대교파들이 한 교단으로 통일하였다. 38
개혁 유대교의 특징은 히브리어로 드리는 예배를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드리도록 했다. 그 당시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모든 예배를 독일어로 드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회에서 사용하는 오르간이나 성가대를 도입했다. 그리고 설교도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개신교 목사들도 유대교의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오게도
만들었다.
개혁 유대교인들은 토라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것을 믿으며 또한 성서를
기록한 개인에 의해 쓰여진것을 인정하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유대교인들은
율법을 개인에게 적용하도록 권장해주었다. 그리고 개인이 직접 하나님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었다.
개혁 유대교인들안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들 중에는 유대교의 정신을 되
찾으려는 그룹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생겨난 파가 보수파 유대교(Conservative
Judaism)였다. 1845 년경에 랍비 스가랴 프랑켈(Rabbi Zechariah Frankel, 1801-1875)은
개혁유대파에서 분리되어 나와서 보수파 유대교를 설립했다.39 프랑켈은 예배언어가
히브리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중에 유대 신학교의 학장으로서 봉사를 하였다.
특히 유럽에 보수 유대교를 위해서 많은 신학생을 배출하였다.
보수파 유대교의특징은 개혁 유대교와 같은 점이 많다. 그리고 토라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말씀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보수파 유대교인들은 할라카(Halakhah)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유대교는 이제 정통파가 있으며 그 옆에 개혁파와
보수파 셋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히브리어, 각나라의 방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유대인의 역사는 근대사를 향해 가고있다.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의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우리가 사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각주 Endnote s
1 스피노자의 업적은 계몽주의(Enlightenment)발전의 중요한 공헌을했다. It has become clear that Spinoza
work is a decisive engine behind the development of the Enlightenment” Antionio R. Damasio, Looking for Spinoza:
Joy, Sorrow, and the Feeling Brain (Orlando and Austin: A Harvest Book, 2003). P. 257.
2 스피노자의 부모는 포르트갈에서 피난온 스발딕 마라노인(Marrano)들이었다.부친의 이름은
미카엘(Michael) 포르크갈어로는 미가엘(Miguel)이며 모친의 이름은 하나 드보라(Hana Debora)이다. Steven
M. Nadler, Spinoza, a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 13.; Damasio. P. 17.
3 바룩(Baruch)은 히브리어이며 라틴어로는 베네딕틴(Benedictus)이며 이름의 의미는 ‘축복받은자’이다.
그의 부모는 그를 Bento 라고도 불렀다. 그는 세개의 이름을 가진자였다. 그는 그의 이름들처럼 매우 복잡한
자였다. 그래덧 많은 학자들은 그를 이해하려면 여러곳에서 모아야 한다고 한다. Damasio.p. 16.
4 스피노자는 마라노계 후손이었다. 그는 유대교의 영향보다는 철학부분에서 더 큰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반대로 유대교와는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었다. 그는 그의 사상으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다. 그가
출교당한때 나이는 23 이며 죽을당시 45 때 까지 유대교와는 단절되었다. 그의 죄는 무신론때문이었다.
Raphael Patai, The Jewish Mind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7). P. 231.
5 Damasio. P. 13.
6 The Cambridge Companion to Spinoza, ed. Ed. by Don Garret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26-27. 그는 자연과학과 철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7 학자 노발리스(Novalis)는 스피노자를 하나님에 흠뻑젖은 자라고 말함.Ibid., p. I.
8 출교장의 내용은 그는 유대교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불경건한 행동를 한것들로 적혀있음.Ibid. p. 16.
9 Nadler. P. 137.
10 The Cambridge Companion to Spinoza., p. 15. 어떤 설에는 여동생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음.
11 24 살때 기록을 보며는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이 살았다고 기록 되었다. Ibid. P. 22.
1212 그는 일생을 홀랜드(Holland)에서 보냈다. James Carroll, Constantine's Sword: The Church and the Jews
(Boston and New York: A Mariner Book, 2001). P. 406.
13 “Spinoza”, XV., "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cMillan, 1993). P. 278.
14 이책은 1670 년경에 출판되었음.
15 도덕책인 ‘에디카’는 그은 죽은 후 1677 년경에 출판되었음. 책의 이름은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e.
16 스피노자의 신학은 범신론(Pantheism)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의 모든것이 신의 모습이라는 뜻. “Spinoza”,
XV., "Encyclopaedia Judaica." P. 279.
17 스피노자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주적인 메시지라고 말함.Nadler. p. 280.
18 The Cambridge Companion to Spinoza. P. I.
19 Ibid. p. 409.
20 유대적 계몽주의 다리역활을 한 자이다. Patai. Pp. 224-5.
21 George Robinson, Essential Judaism: A Complete Guide to Beliefs, Customs, and Rituals (New York: Pocket
Books, 2000). Pp. 428-30. 멘델스존은 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기독교와 유대교를 잘 융화하려고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구분할때면 그는 유대교를 택했다.;Max I. Dimont, Jews, God, and History,
2nd e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2003). P. 307.
22 Dimont. p. 307. 그는 근대 독일의 미학의 고등비평(Modern aesthetic criticism) 창시자로 불리운다.
23 그는 유대교가 계몽주의에 비하하기 보다는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주장했다. Raymond P.
Scheindlin, A Short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 165.
24 하스칼라는 18-19 세기 시대 유럽의 유대교 계몽주의 운동이었다. 모세 멘델스존의 의해서 더욱 발전해
나갔다. Robinson. P. 55.
25 유대사의 근대시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많은 견해들이 있음. 어떤이들은 멘델스존의 하스카라부터 보는
학파가 있으며, 또 다른 견해는 20 세기 학자 시몬 두브나우(Simon Dubnow)에서 나온다. 그는 근대시대를
불란서혁명때로본다. 이유는 이때에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발부 받았기 때문이다.Dean Phillip Bell, Jews in
the Early Modern World (Lanham: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8). Pp. 7-8.
26 1791 년 9 월 28 일, 처음으로 유대인들은 불란서의 시민으로서 선서를 하게 되었다. Robinson. Pp. 469-70.
27 대 산헤드린공회는 프랑스에서 1800 년경에 열렸으며, 헤롯성전이 허물어진 후에 처음으로 열린
공회이다. Dimont. P. 313.
28 산헤드린공회에서 내런 결정은 유대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정치적인 면을 제거했다. 나포레옹전에는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 종교및 정치면을 동시에 인정했었다. 이제는 유대인은 게토의 구성이 아니라
프랑스나라의 시민이 된것이다. 잃은것도 있고 얻은것도 있음. Ibid. Pp. 313-4.
2929 Scheindlin. P. 166. 대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인의 집합권을 무효와하고나서는 공회를 해산시켰다.
30 Bell. P. 50.
31 참조. "Encyclopaedia Judaica."
32 Alan D. Schrift,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Key Themes and Thinkers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6)., pp. 99-100. 한때 천주교인으로 개종하였으나 나중에 유대인의 긍지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는 죽기 몇
주 전에 병든 몸을 이끌고 비시 프랑스가 제정한 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등록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몇시간씩 줄을 섰다. 그리고 이틀후에 폐질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3333 Ibid. pp. 158-160.
34 Ibid. pp. 156-158.
35 Ibid.pp. 119-122.
36 이들은 또 ‘성경중심자’라고도 부른다.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 ed. R. J. Zwi and
Geoffrey Wigoder Werblowsk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391.
37 Ibid. p. 577.
38 홀드하임의 지도력으로 개혁파유대교는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주장은 유대교와
이방인들의 벽을 내리고, 유대교의 국가적 전통을 없애자고 말함. Ibid. p. 330.
39 프랑켈은 유대교에서 근대 엿사운동(Historical Movement)를 창설한 자이기도 핟. 이 운동의 핵심은
정통파의 보수와 개혁파의 진보파사이를 주장하는 운동이었다. 19 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영적운동이었다.
Ibid. p. 259.
참고문헌 Bibliography
Bell, Dean Phillip. Jews in the Early Modern World. Lanham: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8.
The Cambridge Companion to Spinoza. Edited by Ed. by Don Garret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Carroll, James. Constantine's Sword: The Church and the Jews. Boston and New York: A
Mariner Book, 2001.
Damasio, Antionio R. Looking for Spinoza: Joy, Sorrow, and the Feeling Brain. Orlando and
Austin: A Harvest Book, 2003.
Dimont, Max I. Jews, God, and History. 2nd e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2003.
"Encyclopaedia Judaica." I-XVI. New York: McMillan, 1993.
Nadler, Steven M. Spinoza, a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 edited by R. J. Zwi and Geoffrey Wigoder
Werblowsk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atai, Raphael. The Jewish Mind.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7.
Robinson, George. Essential Judaism: A Complete Guide to Beliefs, Customs, and Rituals. New
York: Pocket Books, 2000.
Scheindlin, Raymond P. A Short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Schrift, Alan D.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Key Themes and Thinkers.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