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동유럽의 유대인들의 삶
Life of Jews in Eastern Europe
1264 년경에 폴란드(Poland)에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 폴란드왕
볼레스라브(Boleslav)가 유대인들을 그의 나라로 초청한 것이다.1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모든 자유와 권위를 보장해 주기로 하였다. 폴란드에 사는 모든
시민들과 동등하게 대해 줄 것을 약속하였으며 누구든지 유대인들을 해치면 사형을
당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보호하라고 권유했다.
폴란드는 약 90 퍼센트가 천주교인들이다. 그래서 이 의미는 폴란드의 시민들은
유대인들을 보호해야 할 뿐 아니라 이들의 삶을 도와 주어야 했다.2 그러한 왕의
보호를 받은 유대인들은 나라에다 30 퍼센트의 세금을 바쳤다.
1567 년경에 폴란드왕 지시스몬드 아우구스도스 II 세(Sigmund Augustus) 역시
계속해서 폴란드로 유대인들을 초청하는 정책을 펼쳤다.3 특히 1569 년도에는
폴란드가 리투아니아 (Lithuania)를 정복 했을때4 유대인들은 새로운 땅에 까지도
정착할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렇게 폴란드인들이 유대인들을 선대 한것은
폴란드가 그리스도교국가로써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당시에 많은
그리스도국가들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으로 보고 있었으며 또한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적으로 보게 하였다.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나라가 부해지기를 원했으며 또한 유대인들도
고위직분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은 세리, 공무원, 부동산업자, 농부등의 직업을
가지고 폴란드 개발에 협력하였다.
폴란드로 온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크림(Crimea) 러시아와 중동지방 그리고
스페인에서 왔으나 서 유럽의 추방정책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서 유럽에서 몰려왔다.
이들은 아쉬크나짐 유대인들이었다.5 이런 현상으로 폴란드의 유대인들의 숫자는
15 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숫자는 폴란드의 인구의 5 퍼센트나 되었다. 그리고
17 세기 중반에는 45 만명이나 되었다.6 폴란드는 디아스포라가 모인곳 중에서 가장
큰 곳이되었다. 7
이들의 공동체는 세금을 모아 폴란드정부에 바쳤으며 이들을 주관한 것을
크힐랏트(kehillot)라고 부른다8. 크힐랏트는 유대인이 사는 공동체의 지도층이었다.
그리고 영적인 일들은 랍비들이 감당하였다.
이 당시에 사용된 언어는 이디시(Yiddish)였다. 남자는 히브리어를 배웠으나
여인들과 아이들은 이디시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디시는 모국어로 인정되었다.
이디시는 히브리뜻으로 “유대인”이라는 말이며 이디시어는 온 유대인들이 사용한
언어는 아니다. 디아스포라가 거하는 곳마다 이들의 언어는 달랐다. 예를 들어서
“라디노”어도 매우 많이 사용되었던 언어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디시어는 나중에 언어로써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디시어에 그들의 정신과 애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사는 곳을 옮길 때 마다 이시디 언어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기도 했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이디시 언어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가끔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특히 유대인들의 고위 직위에 대한 질투심과
반감은 여기 저기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상술과 성공은 소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위기를 느끼게도 하였다.
항상 좋은 때가 있으면 힘든 때도 오듯이 유대인들의 학대는 오고야 말았다.
폴란드가 1569 년경 리투아니아를 정복하였을 때 함께 정복을 당한 민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Ukraine)인들과 벨라루스(Belarus)인들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시민 반란을
유대인들을 상대로 일으켰다. 1635 년에 일어난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두번째의 반란(1648-9)은 결과가 달랐다.9
우크라이나민족의 지도자였던 복단 크미에닉키는 코사크(Cossaks)인들과 힘을
모아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귀족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였다.10
(우크라이나인들은 희랍정교를 믿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은 약 10 만명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의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갈 곳이 없는 유대인들은 여기 저기 숨어 다니기에 바빴다.
크미에닉키의 대량학살 사건(Chmielnicki massacres)으로 역경을 겪었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폴란드에 남아있었으며 18 세기가 되면서 이들의 숫자는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사기와 위치는 옛날에 비해 많이 회복하지
못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폴란드 게토지역에 남아서 살았다.
크미에닉키의 학살사건으로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본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해 줄 자를 갈망했다. 특히 모든 재산과 가진것을 잃은 자들에게는 영적인일
밖에는 남은것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위협과 협박은 동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숨이 막히는 일이었다.
이러한 때에 유대교의 신비주의였던 카발라가 인기를 얻었다. 카발라는
스파르티공동체에서 시작된 유대인 신비주의였다.11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랍비의
권위적이고 지배하려는 경향을 경멸했다. 그래서 카발라의 정신을 선호했다. 그러는
가운데 거짓메시야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사밧테 즈비(Shabbetai Zvi)였다. 즈비는
스머나(Smyrna) 터키에서 태어났으며 매우 카리스마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칭해
`메시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는 위협을 받자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목숨을 건졌다.
이렇게 유대교안에서도 혼잡한 사이에 유대교는 나뉘어지고 만다. 랍비파와
민중신앙의 파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어왔다. 그리고 민중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도자는
랍비 이스라엘 벤 엘리에셀(Rabbi Israel ben Eliezer, 1700-1760)이었다. 그는 또한
“선한이름의 스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어로는 바알 셈 토브(Ba’al Shem
Tov) 약명으로는 베싯트(Besht)라고 한다.12
베싯트는 옥굽(Okup)이라는 서 우쿠라이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고아로 자랐으며 아무일이나 하면서 그의 생업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회당에서 일을
하면서 문지기도 하였다. 그는 고등학문을 배운적이 없으며 방랑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의 사상에는 방랑의 삶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카발라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또한 그는 높은지위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러한 위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카리스마였다.13 그의 입장은 항상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랍비의
전통과 형식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자들이 따랐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그는 글 또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그가 구두로 가르친 것을 모아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오늘날 하시딤(Hasidism)파의 시작이다.14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경외롭다”라는 뜻이다. 15
사딕(Zadik)은 오늘날에도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일컬으며 율법에 능통한 자를 말한다.16
하시딤의 가르침은 특히 기도를 강조한다. 보통 유대인들에게 기도를 통해서
현세와 영세를 분별하도록 한다. 어떻게 기도를 하는것이 어디서 기도를 하는 것 보다
중요하게 본다. 신실함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또한 삶속에서도 기도 한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시딤의 목적은 성화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베싯트는 또한 율법의 “의인”(Righteous One)의 정신을 되 살려서 그들의
가르침을 더 강조했다. 동유럽 전체에 다른 하시딤파들이 생겨났다.
하시딤운동은 퍼져나가면서 적수가 생겼다. 많은 적수 가운데 특히 빌나
가온(Vilna Gaon)이라는 랍비 엘리아 벤 솔로몬(1062-83) (Elijah ben Solomon)이라는 자가
있었다. 17그는 전통적인 유대교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미트나딤(mitnagdim)이라는 책을
써 하시딤파를 공격하였다. 미트나딤의 핵심은 율법의 보편화와 베싯트가 거짓메시야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많은 하시딤은 출교를 당하였으나 나중에는 미트나딤이
사라지고 하시딤이 오늘날 정통 유대교의 부분이되었다. 18
유대인들이 러시아에서 폴란드로 왔으나. 유대인들에 대한 러시아는 역사가
깊다.19 1772 년과 1775 년에는 폴란드가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었다.20 그리고 폴란드의
워사(Warsaw)의 공작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왕(Czar)인 알렉산더 I 세가 차르(Czar)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유대인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만
해도 러시아는 유대인들을 반가히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762 년부터 1796 년까지, 에제 캐서린(Catherine the Great)은 유대인들에게
원만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러시안 시민들의 반감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켓토에서 살면서 생업을 유지해 나갔다. 유대인들이 러시아에서 제한된
구역에서 산 곳을 `페일정착(Pale Settlement)’이라고 부른다.21
페일 정착은 러시아의 유대인에 대한 정책이였다. 1812 년 페일정착의 경계선이
그려져 있었다. 이제부터는 유대인들이 러시아전역지역에서 25 군데 외에서는 살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북쪽의 경계선은 발트해(Baltic Sea)서로 부터 남쪽으로는 흑해(Black
Sea)였다. 여기에 속한 곳은 우쿠라이나,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크림과 폴란드부분이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이 지역에서만 살아야 했다.
이렇게 러시아에서 사는 유대인들은 소외를 당하면서 살게 되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매우 제한을 받았다. 이들은 주류사회와 단절되었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가운데 유대인들은 많은 곳에서 또한 도움을 받았다. 자선단체에서 특히
유대인들을 많이 도왔다. 그리고 유대인들끼리도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이때에 또한
토라의 연구와 영적부흥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자들이 유대교를 찾았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계속되었다. 1825 년에서 1855 년까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I 세(통치기간 1825-55)는 유대인들에대해 매우 혹독하였다.22
그는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가져온 사상이나 나쁜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 핍박을 하였다.
그리고 유대교의 연구소를 없애고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경찰과 정부기관를 세웠다.
1827 년경 니콜라스 는 군인수용소(Cantonist camp)를 세워놓고 유대인의 남자를
징병제도에 참여하게 하였다.23 남자의 나이는 열 두살부터 스물 다섯살까지로 하여
기간을 25 년동안 군대에 있게 했다. 그리고 군대의 환경은 매우 가혹하고 엄했다. 그래서
유대인의 많은 남자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군병제도의 목적은 유대인
남자로 하여금 유대교를 준수하지 못하게 했으며 강제로 그리스도인을 만들었다.24
그래서 남자들은 돼지고기를 먹게 하고 강제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안식일(토요일에 엄수함.)또는 다른 유대교의 절기를 강제로 못 지키게 하였다. 그래서
군병제도의 기간이 지날때 쯤에는 유대인 남자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는
했다.
알렉산더 II 세(1818-81)가 왕권에 올랐을 때 환경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1885 년에서 1881 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하면서 농민들과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었다. 특히 부한 유대인들에게는 겟토 밖에서 사는 것도 허용했다.25
러시아에서 산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리고 이들의
삶에 많은 제한을 두고 이들의 진보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땅을 사는 일은 금지되었으며
유대인 자녀들이 공립학교에 다니는 것도 숫자의 할당에 한에서만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탄압을 많이 하였다. 특히 얄무카를 쓰는 것을 금했다. 얄무카는 유대교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할때 쓰는 자그마한 모자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두었다. 러시아는 두가지의 유대인들로 분류시켰다.
“필요한 유대인”과 “불 필요한 유대인”들로 분류해서 불필요한 유대인들에게 한해서
진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유대인들은 뇌물을 통해서 살아나가야 했다.
이러한 제한된 삶속에서도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 계속 증가하였다.
1825 년경에는 러시아 인구중 3 퍼센트를 차지하는 1.6 백만명이 살고있었으나
나중 1880 년경에는 러시아안에 사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4 백만가량되었다.
1871 년에 오데사(Odessa)에서 첫번째 유대인들의 소수민족 학살사건
(Pogrom)들이 발생했다. 이 학살사건의 원인은 슬라빅(Slavic)족과 그리스인들의
증오심에서 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정부에서 인준한 학살사건은 1881 년에
일어났다.
알렉산더 III 세(1881-94)는 그의 부친의 암살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26 학살사건의 원인은 여러가지로 볼 수 있었다. 특히
러시안농민들의 반감과 증오심을 모두 유대인들에게 쏟아부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희생의 양이 되 버린것이다. 설교상대에서는 신부들이 유대인을
공격하였으며 경찰은 시민들을 격동시켜서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인들에게 또 한번의 위기였으며 환란이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러시아땅에서
안전한곳을 찾을 수 없었다. 러시아 안에서 피할곳을 못 찾은 유대인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피할곳을 찾은곳은 미국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이렇게 유대인들을 핍박하면서 한 가운데는 이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민중들은 러시아왕족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라의 경제는
엉망이었다. 귀족들과 땅의 소유주자들 역시 왕족의 무능함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지성인들 사이에는 새로운 사상이 떠 올랐다. 러시아는 혁명의 열망이 불 타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러시아의 혁명가 중에 많은 자들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볼셰비키(Bolsheviks)의 멤버들중에 유대인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볼쉐빅의
주동자는 블라드미어 레닌(Vladmir Lenin,1870-1924)이었다.27
레닌은 1917 년에 러시아의 황제를 폐지시키고 공산주의(Communism)를
도입하였다. 레닌의 혁명에 동참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교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유대교의 정신을 이용해서 공산주의를 종교로 만들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유대교를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종교는 아편과 같은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막시즘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했다. 칼 막스(Karl Marx)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Religion is
the opium of the people”이라고 외치면서 민중을 노예에서 그리고 종교의 복종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했다.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의 두번째 지도자 역시 유대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레온
트로추키(Leon Trotsky, 1879-1940)었다. 트로추키의 본명은 레위브 다윗도빅
브로스타인(Lev Davidovich Bronstein)이였다. 그는 유대교에서 자랐으며 공산주의 사상을
숭배했다.28 그리고 러시아혁명당시 그는 레닌옆에서 함께 있었다. 트로추키의 사상은
유대인들이 러시아에서 살아남으려면 러시아화 해야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전통이나 유대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또한 유대인의 고난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공산주의 만이 살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공산주의를
지지해 줄 것을 바랬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후 곧이어서 내란이 일어났다.29 적군(Red Army)은
백러시안들과 싸웠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파들과도 전쟁을 해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가운데 끼었다. 백러시아인들은 유대인을 증오했으며 다른자들이 볼
때에 유대인들은 다 볼세비키로 보았다. 그리고 어떤 유대인들은 적군에 참여했다.
여기에 참여한 자들은 공산주의의 슬로건에 넘어간자들이었다. 공산주의는 모든자들에게
평등을 약속했으며 러시아의 왕족아래서 다 자유를 얻을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혁명은 일어났으며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이제 새로운 사상과 환경밑에서
살아야만 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유대인들은 처음 10 년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러시아 어느지역에서도 마음놓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민족학살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민족의 학살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공산정부가 개인의 재산과 땅을 다 압수했기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모든것을 감시했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없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이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러시아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언론과 문화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디시 공산신문은 이제 유대인들의 신문이 되었고 이디시극장연극은
러시아전국을 다니면서 공연하였다.30
그러나 러시아에서 한 가지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유대교를
폐지하라는 명령이었다. 1919 년경에 러시아에서는 유대교를 허락하지 않는
법이내려졌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시오니즘(Zionism)역시
금지되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의 기금을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려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거의 독립운동과도 같았다. 공산주의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와 종교를 행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공산정부는 유대인들을 한 민족으로 보고 유대지역을 만들었다. 1930 년에
공산국은 러시아 남동쪽에 조그마한 마을을 책정해주었다. 이 지역의 이름은 비로비드잔
(Birobidzhan)이라고 불렀다.31 사실상 이곳은 슬럼지역이었다. 이곳에 산 자들은
정치범과, 귀향 온 자들 그리고 토색인들이 산곳이었다. 겨울에는 매우 추웠고 땅도
메말라 아무것도 나지 않는 곳이었다. 공산정부는 유대인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굶주림과 가혹한 상황에서 견뎌내야만 했다. 오늘날 이곳에는
공식언어가 이디시(Yiddish)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찾아 볼 수 없다.
러시아에서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억압을 당했다. 특히 1924 년에 레닌이 죽은
후에 공산당에서는 권력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두 명의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요셉
스탈린(Joseph Stalin)과 리온 트로츠키(Leon Trotsky)였다. 스탈린이 공산당의 지도자로
올라오게 되었다. 스탈린은 매우 냉혹한 지도자였다. 그는 그의 권력을 모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는 그당시 유대인들이 공산당에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는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을 학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이 스탈린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민족으로는 제일 컸다.
그리고 스탈린은 `대 공포” 1934-1939 (the Great Terror)’를 통해서 모든유대인들의 기관과
모임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1945 년경에는 공산당안에 유대인은 몇명 남지않았다.
스탈린은 계속하여 유대인들을 탄압하였다.
1953 년에 스탈린이 죽은후에도 유대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쿠르스체프(Khrushchev)가 당수가 되었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종교의 압박을 받고있었다.
회당의 숫자도 몇 되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유대인 학생들에대한 입학 할당도
얼마되지않았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은 소비엣유니온(Soviet Union)에서 열심히
살았으며 또한 그들이 몸담고 있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시오니즘은 1960 년도에 절정에 따랐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계각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고있었다. 러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특혜를
주지않았다. 1971 년에 브르제네브(Brezhnev)가 처음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때에 약 25 만명의 러시안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80 년도에 다시 법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학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레푸세닉크”라고 불렀으며
이들은직장도 가질 수 없었으며 또한 사회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과
세계의 언론의 영향으로 러시아정부는 유대인의 이민을 다시 허락해 주었다. 이러므로
러시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오늘날에는
러시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인구의 20 퍼센트가량된다.
각주 Endnote s
1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합법적으로 정착한 시기는 13-15 세기로 보고 있음. 이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한것은
폴란드 왕 경건한 볼레슬라브 5 세(Boleslave V the Pious)의 칙령으로 알려져있음.
2 그러나 왕의 선대한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도 많았다. 특히 교회와 사업사들은 반대를 하기도 하였다. Cecil
Roth, A History of the Jews: From the Earliest Times through the Six Day War (1971). P. 267.
3 지그몬드 2 세는 야겔로왕조(Jagello)의 마지막 왕이였고 유대인들이 직접 그들의 랍비와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오직 왕만이 이들의 일을 관섭할 수 있었다. Ibid., p. 269.
4 이로말미암아 폴란드와 리투이니야는 연방국(Commonwealth)이됬다.
5 이들은 폴란드에 살면서 문화적과 사회적을 많은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문화에 영향을 준 자들은
하시데이 아쉬그나지(Hasidei Ashkenaz)의 제자들로 보고 있다."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acMillan and Keter Publishing House, 2007). XVI., p. 294.
6 Dean Phillip Bell, Jews in the Early Modern World (Lanham: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8). P. 56.
7Ibid.p. 53. 폴란드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당시 온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제일 많이 모여 살았다.
8 크힐로(Kehilla)는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그리고 크힐롯은 지도자를 말함. Ibid. P. 94.
9 1648-49 학살은 역사적으로 크미에닉키 대량학살 사건(Chmielnicki massacres)으로 알려져있다.
100,000 여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고 우크라이나공동체는 파멸되어버렸다. “Ukraine”, "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cMillan, 1993). Xv. , p. 1517.
10Michael T. Florinsky, Russia: A History and an Interpretatio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3). P.
258.
11 “Kabbalah”, X., "Encyclopaedia Judaica." P. 489.
12 “Israel Ben Eliezer Ba’al Shem Tov”, IX., Ibid. p. 1049-1058.
13 그의 얼굴에서는 광선이 비쳤다고 함. Max I. Dimont, Jews, God, and History, 2nd e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2003). Pp. 290-1.
14 “Hasidim”, VII., "Encyclopaedia Judaica." p. 1391.
15 하시딤은 영어로 ‘Pious’라는 뜻으로 의롭고 경건하다는 의미임.
16 유대교에서 ‘사딕’ 또는 ‘의로운 자’(Righteous One)는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해주는 자를 일컷는다. Roth. P.
314.
17 그의 본명은 요셉 하 코헨(Joseph Ha-Cohen)으로 알려져 있다. “Gaon”. VII., "Encyclopaedia Judaica." P. 323.
18 Roth. P. 315.
19 유대인들은 가는곳 마다 항상 두가지의 반응을 일으킨다. 하나는 이들의 상업성공때문에 반가히
맞이하나 또 하나는 본토인들에게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러시아에서도 나타난다.
Nathan Haskell Dole, Young Folk's History of Russia (Akron, Ohio: The Saalfield Publishing Company, 1903). P.
113.
20 Raymond P. Scheindlin, A Short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 173.
21 페일 정책은 지역만 제한 한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로 하여금 러시아어, 문화 종교를 받아드릴것을
요구했다. Sidney Harcave, Russia: A History, Fifth ed. (Philadelphia and New York: J. B. Lippingcott Company,
1964). P. 240. 페일정책은 러시아제국이 함락되고 러시아혁명때까지 지속되었다.Scheindlin. p. 173.
22 Scheindlin. P. 175.
23 이 징병제도 이름은 영어로 Cantonist battalions 라도 부른다. Ibid.
24 Dimont. Pp. 318-9.
25 Ibid. p. 319.
26 “Alexander III”, II., "Encyclopaedia Judaica." P. 570. 알렉산더 3 세황제가 직위에 올랐을 때는 러시아에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많은 젊은 유대인 청년들이 이 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직위에 오르자
진보적인 정신을 가진자들과 사상을 가진자들을 억압하려고 했고 독제적 왕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27 레닌의 외할아버지쪽이 유대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의 이름은 Asher Blank 로 알려져 있다. Martin
Gilbert, The Jews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Schocken Books, 2001). P. 102.
28 Ibid. Pp. 100-3. 그는 1917 년 볼세비키혁명을 총괄한 지위관이었다. 그리고 볼세비키의 정권을 가능케
한자였다.
29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난 후 1921 년간 러시아에서는 내란이 벌어졌다. 적군(Red Army)은 우크라이나
군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백군(White Army)은 지방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유대인들은 양군에 가입해서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백군인들은 유대인들을 증오하고 학대했다. “Russia”, XIV., "Encyclopaedia
Judaica." P. 458.
30 Roth. P. 185. 이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유대청년들은 러시안을 옹호했다. 이유는 러시안만이 이들을
출세시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31 ‘비로비드잔’은 대량유대인의 집단을 말한다. 이지역의 넒이는 벨기에(Belgium)나라 만하다. Scheindlin. P.
186.
참고문헌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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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 2008.
Dimont, Max I. Jews, God, and History. 2nd e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2003.
Dole, Nathan Haskell. Young Folk's History of Russia. Akron, Ohio: The Saalfield Publishing
Company,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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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acMillan and Keter Publishing House, 2007.
Florinsky, Michael T. Russia: A History and an Interpretatio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3.
Gilbert, Martin. The Jews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Schocken Books, 2001.
Harcave, Sidney. Russia: A History. Fifth ed. Philadelphia and New York: J. B. Lippingcott
Company, 1964.
Roth, Cecil. A History of the Jews: From the Earliest Times through the Six Day War, 1971.
Scheindlin, Raymond P. A Short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