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종교자유를 위한 반란
Rebellion for the Religious Freedom
1.종교자유를 위한 반란
Rebellion for Religious Freedom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역사에 나타남은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mixed blessing 이었다.1 헬라문화는
유대인들에게 긍정적인 혜택도 있었으며 또한 부정적인 문제도 가져다 주었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러한 변화들은 자극을 일으켰다. 헬라문화를 따르려는 파들이
생겨났고, 옛 모습의 유대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tension 은
마침내 시민전쟁을 불러 일으켰다.2 여기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막강하였다. 그 당시 지도에 알려진 세계를 정복한
헬라인들은 이들이 가는 곳 마다 식민지를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정복한 도시들의 이름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인디아 또는 이집트의
도시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이 있다.3 헬라정복자들은 가는곳마다 또한 교육,
문화, 종교에 관해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 사용은 매우 중요했다.
헬라어는 이제 세계적인 언어가 되었다. 특히 사업과 문화교류에 있어서 헬라어는
필수적인 언어였다. 성경의 신약이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사실만으로 보아도 헬라어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헬라문화의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이제 예루살렘을 둘러싼 모든
도시들은 헬라문화의 도시로 변했다. 이제 유대인의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자체도
헬라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에 있어서헬라 문화를 누구나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헬라문화가
유대에 들어왔을때 반응은 다양하였다. 어떤 유대인은 헬라문화를 온전히 다
받아들였으며, 다른이는 문화를 떠나 사막으로 옮겨간 이들도 있었다. 사막으로 간 자들은
르갑인(Recabites)의 가르침을 따랐다.4
르갑인들은 예루살렘은 타락했다고 믿고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참
유대교를 지탱하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참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면 사막에
나가서 살면서 떠돌이 생활을 할때에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헬라문화를
배척한자들은 사막으로 떠나가서 거기서 유대교를 지켰다.
유대교안에서도 헬라파와 유대파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도 잘
묘사되어있다. 기독교가 세워진 후에도 이 두파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5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쪽은 유대인들중에서 상류에 속한자 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교육 수준 또한 높았다. 또는 제사장후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은
헬라문화를 받아 들여야만 미래가 있다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름을 고쳐서 헬라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서나 친지들 끼리는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일에서도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헬라문화를 배척한자들 또한 이유가 많았다. 이들에게 헬라문화는 저주였다.
그것은 헬라문화가 주는 장점도 있었지만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점이 배척한 첫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헬라가 주는 문화는 세속적이었으며 또한 가치관에 있어서도 유대교와
매우 달랐다. 그래서 이들의 결과는 헬라문화와 유대교는 결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정부에다가 세금을 낼 정도로 더 이상 타협하지 않았다.
유대교에서 역사적으로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파를 `사두개(Sadduesses)파’6라고
하며 그와 반대로 문화를 배척한 파를 `바리새(Pharisees)파’7라고 부른다. 이들의 이야기는
성경에서도 매우 자주 나타난다. 사두개파에서는 제사장들과 소위 지도자측에있는
선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파중에서는 정통보수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다.
사두개인들의 영향은 클 수 밖에 없었다.이들은 우선 상류층에 있었던
자들이었으며, 또한 교육도 많이 받은 자 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 진출 및 헬라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중의 많은 자들이
제사장이어서 결과적으로 이들이 산헤드린(Sanhedrin)공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산헤드린은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높은 공회였다. 여기에서 유대교의 모든 것들이
결정되었다.8
이때에 다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개혁운동이었다. 개혁운동은 유대교를
빨리 헬라화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대교를 헬라문화에 맞춰서 지킬것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이유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많은 자들이 이제는 히브리어보다는 헬라어가 더
편했으며 자녀들은 헬라어만을 사용했다. 그래서 개혁운동을하는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까지도 했다. 그리고 구두로 내려오는 전통은 다 배척하였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매우 빨리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자 들에게 퍼져나갔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 년에 죽고나서 그의 제국은 갈라졌다. 그리고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게로 넘어가지않고 그의 3 명의 장군들에게 나뉘어졌다. 장군들의 이름들은
안티고노스, 셀루세스, 프톨로미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은 프톨로미였다.9
그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한 헬라문화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는 선정을 하지 못했고 그의 제국은 셀루세스왕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10
기원 전 199 년에는 셀루세스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었다. 셀루세스왕국은
시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셀루세스왕국의 정치는 반 유대교적이었다. 유대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헬라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했다.
기원전 175 년은 유대교에 있어서 매우 고난의 해였다. 셀루세스는 암살을 당하고
그의 동생인 안티오커스 4 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 세(Antiochus Epiphanes IV)로 불린다.11 그는 시리아왕족의 후계로써 헬라문화를
압도적으로 유대교에게 강요하였다. 그가 왜 그렇게 헬라문화를 강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견해가 있다. 어떤 주장은 그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또는
그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부친이 유대인들을 헬라화 시키는데 부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여러가지의 해석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유대교를 타겟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 3 세(Onias III)12를 그의 동생이였던
제이(Jason)슨으로 바꾸었다.13 (제이슨 이름의 의미는 여호수아임). 제이슨은 곧 바로
유대교를 헬라화 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티오커스의 생각에는 제이슨이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안티오커스는 다시한번 제사장을 바꾸었다. 그는
메네라우스(Menelaus)로 대제사장을 바꾸었다.14 유대교에서는 이제 막강한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위기가 왔다.
엄한 법을 통해서 메네라우스는 유대교를 헬라화 해 나갔다. 이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불법이 되고 말았다. (유대교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불법이었다. 법을 어긴 자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의
부모들은 남자아기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 금지를 당했다.15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율법 대신에 세속적인 법을 내 세웠다.
그리고 성전안에 제우스신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유대교는
혼합종교에 속해 버렸다. 이러한 모습을 본 헬라파 유대인들은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개혁의 이름으로 세속화 되가는 유대교를 더이상 그대로 지켜 볼 수 없었다. 안티오커스의
정책은 이제 지지자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에 보수파 유대교의 지지자들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하였다.16
마카비안의 반란이 이때에 일어났다.17 기원전 166 년에 시리아 장군이 모딘을
정복하였을 당시에 그곳에다가 제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제단앞에서 성경에서
금하는 짐승들을 제사물로 드렸다. 이때에 반기를 든 가족이있었다. 이 가족의 이름이
맏타티아 하스맨(Mattathias Hasman)이였다.18
맏타티아의 반란으로 유대교에는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 일어났다. 맏타티아는
유대교에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왕국을 세웠다.19 이것이
마카비였다. 마카비왕족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특히 맏타티아가
죽은후 그의 아들인 유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20 유다는 시리안 군대와 전쟁을 통해 많은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165 년에는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하였다. 그리고
성전을 다시 깨끗케한후 제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다시한번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손에
들어오게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기를 만들었다.21 이 절기는
하누카라고부른다. 또는 “헌신”이라고도 부른다. 하누카(Hanukkah)의 의미는 성전을 재
헌신한다는 뜻(Rededication of the Temple)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성전을
재 헌신하기 위해서는 촛불을 켜야하는데 그당시 성전에는 기름이 많이 있지 않았다.
찾아본 결과 하루 촛불을 켤 수 있는 만큼의 기름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밖에서 기름을
가져오는 데 6 일이 걸렸다. 그러나 새 기름을 가져오는 동안에 하루밖에 쓸 수 없는
기름이 8 일이 갔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탈무드에서는 언급이 되어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하누카절기를 지키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누카는
기쁜날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 헌신하는 날이었으며, 또한 유대교에 있어서 자유를
얻은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대교 역사가들은 하누카는 첫번째 유대교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눅카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외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으며 또한 작은 숫자로써 막강한 군대를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자들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다는 교훈도 포함된다.22
하시모니안 왕가는 몇년을 평화스럽게 유대땅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기원전
161 년경에 또 하나의 일이 터졌다. 이번의 일은 새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이었다. 유다는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력으로 임명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리아군인들이 더 강했다. 그리고 새로운 장군이 임명되었다. 새롭게
뽑힌 장군과 더 많은 군인들은 유대를 장악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유다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23
요나단은 로마제국과 손을 잡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로마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정치를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매일
있는 일들에 대해서 방치해 두었다. 기원전 152 년에는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약 100 년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요나단이 죽고 나서 그의 동생인
시므온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24
시므온은 맏티타스의 마지막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인들로 부터 세금을 면제받는
혜택을 얻어냈으며 유대지방의 자체 행정을 계속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가서 기원전 134 년경에 그의 사위였던 프톨로미에게 그의 두 아들들과 함께 암살을
당했다.25 이것으로써 마카비안왕족이 여기서 막을 내린다.
하시모니안왕족은 반응의 정신을 주장한다. 특히 이들의 생존의 목적은 유대교를
순수한 종교로 이끌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남의 나라를 정복하려거나 또는
이들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순수한 유대교를
유지하기위해서 종교적인 전쟁을 한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교를 배척하는 자들을
이해하였고 또한 유대교를 전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므온이 죽은 후 아들 요한 히카누스(John Hyranus)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26 요한은 기원전 104 년까지 하시모니안 왕족을 지키면서 유대인들을
다스렸다. 그는 그의 사명이 다윗 왕족을 다시 건립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는 또한
사마리안들과 전쟁을 벌였다. 요한이 죽은후 왕족은 매우 약해져있었다. 요한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I)가 대제사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그의 모친이 주관하였다.27
아리스토불루스는 이것이 못 마땅하여 그의 모친을 감옥에 가두고 그녀가 죽을때까지
그곳에 놔두었다. 그리고 왕권을 유지하였다. 그는 그리고 일년 후에 죽고 만다. 지금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은후 왕권은 그의 동생에게로
넘어간다. 동생의 이름은 알렉산더 아네우스(Alexander Jannaeus)였다.28
알렉산더가 직위에 올랐을때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그리고
오만명의 유대인들이 목슴을 잃었다. 그는 그에게 반항한 자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함으로 그의 원수에 대한 대우를 잘 보여주었다.
기원전 76 년에 알렉산더가 죽은후 왕권은 그의 아내였던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에게 넘어갔다. 살로메는 바리새인들과 화합을 맺고
유대땅에 화평을 가져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자식 3 명이 왕권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내적투쟁은 하시모니안왕족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하시모니안왕족의
팔레스타인땅의 정복은 안티파타(Antipater)에게 넘겨졌다.29 안티파타는
하시모니안왕족시대에 강제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63 년경에
유대지방의 감독으로 로마제국으로 부터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두미안이라는 것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30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헤롯(Herod)이
그의 직위에 올랐다.31
헤롯은 성경에 나오는 자이다.32 그는 헤롯대왕으로도 알려져있다. 기원전 37 년 전
부터 주후 4 년까지 유대땅을 치리한 왕이다.33 그의 친구로서는 마크 엔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있으며 이들의 친분관계로 말미암아 헤롯은 유대지역을 장악 할 수
있었다.34 그리고 나중에 유대지역에서 왕이라는 타이틀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대제사장의 직분을 이어 받을 수 는 없었으므로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35 그는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대지역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였다.36
헤롯의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였다.37그는 산헤드린공회를 다시
세웠으며 또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헤롯의 가장 중요한 업적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 설립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성전을 두번째 성전으로 칭하고 있다. 첫번째의
성전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을 이야기 하며, 바벨론의 침략으로 기원전 586 년경에
무너졌다가 에스라와 스룹바벨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재건 되었으며 두번째 성전을
건설 한것이 이 헤롯성전 또는 두번째 성전이라고 한다.
헤롯은 성전건설에 매우 많은 관심과 열심을 쏟았다.38 그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멋있는 성전을 세울 결심을 하였다. 오늘날 예루살렘 서쪽 벽(Western wall:
유대인들이 지금도 이벽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다.)은 헤롯성전의 발코니였다.
헤롯은 그 외에도 많은 신도시를 개발하였으며 많은 곳에다가 기념할 만한 건물들도
세웠다. 그는 카세라항구에 유명한 항구도시를 세우고 지중해에서 오는 무역상인들과
무역을 하였다. 군사적인 위치에서도 그는 많은 곳에 군사기지를 짓고 벽을 쌓기도
하였다. 유명한 마사다도 헤롯이 세운곳이다. 맛사다는 높은 고지에 있는 산을 군사기지로
변형해서 적군을 막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헤롯은 슬기로운 정치가였다.39 그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자였다. 그리고 그의
섬기는 로마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안목도 가졌으며
또한 매우 가혹한 자이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아무도 그를 반대할 자가 없도록
만들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에게는 적을 살려두지 않았다. 한때는 제사장이
세속적인 법을 모세법으로 인용하였을때 헤롯은 제사장들을 다 몰살하였다. 그는 사람을
의심하는 병이 있었다. 특히 아직도 살아있는 하시모니안직계에 대해서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은 하시모니안직계들을 다 몰살할 계획을 가졌다. 여기에 속한
직계중에는 헤롯자신의 직계도 포함되었다.
헤롯은 열번 이상 결혼을 하였다. 그중에 하시모니안에 속한 부인을 두게 되었다.
헤롯은 이 부인을 살해하도록 하였다.40 이 부인의 이름은 마라암이었다. 마리암은 요한
히라카누스의 손녀딸이었다. 이렇게 헤롯은 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직계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을 다 몰살하였다. 그의 자식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헤롯은
하시모니안직계를 남겨두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는 정신분열증을 앓은 자 였다고
기록한다.41
주후 4 년경에 헤롯이 죽자 그가 다스렸던 곳은 그의 세 아들로 말미암아
나누어진다. 아케라우스(Archelaus)는 헤롯의 아들로서 주후 6 년경까지
팔레스타인지역을 다스렸다. 그가 직위에서 내려오게 된 이유는 시민들의 호감을
사지못했기 때문이였다.42 그리고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로마군이 직접 통치하였다.
헤롯의 다른 아들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였다. 그는 갈릴리와
페라야지역을 치리하는 분봉왕이었다.43 그는 성경에 나오는 자 로서 세례요한을
죽인자로 기록되어있다.44 성경에서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그의 동생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지적하였으며 헤롯은 이 일로 세례요한을 죽이게
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주후 39 년경 로마황제 칼리굴라의 명으로 사라졌다.45
헤롯의 장자였던 헤롯 아그리파(Herod Agrippa I)일세는 팔레스타인 북쪽지방을
능력있게 치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후 44 년경에 죽었다.46 헤롯대왕의 차자는 헤롯
아그리파 2 세로 불린다. 아그리파 2 세는 약했으며 그가 즉위한 후 얼마 못되어
로마인들에게 정복을 당한다.47
바리새인과 사두개인파의 등장으로 헤롯대왕때에 분열이 생겼다. 헤롯대왕때 당시
유대교는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번때는 사두개인(Sadducees)파이며 두번때는
바리세인(Pharisees)파이며 세번때로는 엣센스(Essence)파이다. 이 세파들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두번째 성전때를 능가한 파는 오직 바리새인쪽이었다.
사두개인들은 히브리어로써 대제사장 사독(Zadok)의 이름에서 나온것이다.
대제사장 사독은 다윗왕과 솔로몬왕때에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자였다. 사두개인들은
이렇게 제사장직계에 속한자들이었으며 또한 양반의 가문의 후계들이었다.48
사두개인들은 말로 내려오는 전통을 믿지 않았으며, 오직 율법은 기록된것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의 변화를 인정하지않았다. 사두개인들의 율법해석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좁게 해석하였다.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오직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였다. 주후 70 년경에 로마인들이 두번째 성전을 파멸했을때 사두개인들도
사라져 버렸다.49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보다 숫자적으로 훨씬 많았다.50 역사적으로
헤롯대왕때를 기준하여 당시에 약 6 천명 가량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리새인들의 의미는 “구별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보통사람들 사이에서
구별되어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주장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말로내려오는
전통과 모세의 율법을 다 믿고있었다. 이들역시 보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51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를 대중화하였다.52 그리고 대중들이 유대교를
지킬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대교가 특별한 직위에 있는 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대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엣센스파는 매우 과격한 유대교었다.53 어떤이들은 바리새인의 과격한 쪽을 택한
자들이었다. 엣센스들은 유대교를 전념으로 지킨자들이였다. 특히 남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은둔생활과 신비 주의를 믿고 있었다. 이들은 독신주의를 서약한다.54 물론
결혼한 형제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독신주의를 주장한 것은 영적인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엣센스파들은 음식도 조심해서 먹었다. 이들은 음식의 법을 엄하게 따랐다.
이 음식법을` 카스르(Kahrut)’라고 부르며 오늘날에는 유대교의 음식법을
`코셔(Kosher)’라고 부른다. 코셔음식은 구약에 나오는 엄한 음식법에따라서 만들어진
것을 이야기한다.
나사렛 예수님(Jesus of Nazareth)이 팔레스타인 땅에 계셨을때 엣센스파들은
활약을 많이 하고 있었을때였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엣센스파들과 접촉을 하고 계셨다.55
예수님은 나사렛지방에서 자라셨으며 자라온 많은 시간을 갈릴리 지방에서 보내셨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으며 성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로 나타나셨다.56 예수님은
평범한 자들을 제자들로 삼으시고 병든자들, 가난한자들, 마귀에 들린자들을 고치신
메시야이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외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고 또한 많은무리가 따랐지만 유대교의
지도자들 층에서는 많은 미움을 사셨다. 주후 30 년경에 예수님은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57 죄명은 유대교의 법을 어긴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후에 다시 부활하였다고 가르치고 전도한다.
역설적으로 처음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다 유대인들이었다.58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에는 유대교와 함께 존속하였다 기독교의 가르침, 예배형식, 법과 풍습은 유대교에서
나왔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역시 다소(Tarsus)에서 온 유대인이었다.59 그는 유대인이
아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60 그리고 이렇게 전파된 복음은 세계에 널리 퍼져나갔다.
학식을 갖춘 자들이 바리새인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학자중에서는
힐렐(Hillel)과 샤매(Shamaiah)가 있었다.61 이들은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기울어진
자들이었다. 주후 100 년경에는 힐렐학파와 샤매학파가 존속하였다.62
샤매학파는 장로 샤매가 설립한 학파로써 기원전 50 년 부터 주후 30 년까지 살았다.
샤매는 지혜가 풍부하고 성격이 매우 급한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토라)에서 나왔다. 그의 해석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특히 성결에 있어서 그는 매우 관심을 많이 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 록 샤맨학파는 사두개인파처럼 유대교에서 사라져 버렸다.
힐렐학파 역시 모세의 율법을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했다. 힐렐은 (30 B.C.-A.D. 10)
샤매와 항상 경쟁을 이룬자 였다. 힐렐은 또한 힐렐 바벨론 (Hillel Babylon)으로도
알려져있다. 유대교의 전통에 힐렐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는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전해졌다.63
유대교에게 큰 영향을 준 힐렐은 주후 400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또
유대교에 대해서, 힐렐이 유대인들이 아닌자 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타 종교에 있는
자들이 유대교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쉽도록 만들어 놓았다.
주후 6 년경부터 41 년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을 7 구역으로 나누어서 로마국이
치리하였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7 구역가운데 한 구역을 치리하였다.64
유대지방은 이렇게 하여 로마인들로 부터 보호를 받으며 이들의 치리 아래에 있었다.
로마국 역시 유대인들의 법이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인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세금을 잘 내고 로마국의 정치에 피해를 안 주면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방치로 말미암아 무질서해졌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자주 마찰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마찰은 로마국의 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국의 통치아래있던 유대인들로 인해서 반란이 일어났다.65 이 반란은 로마국의
불 공평한 세금제도때문이였다. 이 반란은 두 명의 유대인 지도자들의 주동으로
펼쳐나갔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로마국에세금을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반란을 억제하였다. 이런일이 난 후 부터는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엄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패배, 그리고 억제당함은 팔레스카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서 계속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여기에 처음 반란의 지도자들의 이름은 갈릴리인 유다(Judas the Galilean)와
바리새인인 사독(Zadok the Pharisee)이었다. 여기에서 갈릴리 유다는 나중에 열정파라는
이름을 가진 셀롯(Zealots)파의 시조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질롯트파는 이스라엘의
애국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중에서도 셀롯이라하는 시몬이 있다.
유대인들의 반란은 거의 소규모의 것들이었으나 주후 44 년경에 일어난 반란은
매우 심각했다. 이 반란도 로마인들에게 탄압되었지만 생명을 잃은 숫자들은 천명이
넘어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거대한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 반란의 이름이
유대인의 로마와의 전쟁(the Roman Jewish War of 66-70 A.D.)이다.
이 유대인의 로마전쟁의 원인은 행정적으로 시작되었다. 카세리아지방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사이에 생긴 마찰로 벌어졌다. 그당시 카세리아지방은
팔레스타인구역의 로마행정국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당시 행정관이었던 세시우스
프로러스는 이방인들의 편을 들고 유대인들을 진압하고 예루살렘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무자비하게 못박아 버렸다. 이러한 로마국의 대한 행태는
유대인들을 자극하였다.
유대인들은 힘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군인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에 새로운 군대를 보내었으며 이번에도 또 유대인들이
로마군인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에서 새로운 장군과
군단을 보냈다. 장군의 이름은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Flavius Vespasian) 이었다. 이번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군단은 로마제국에서 훈련을 잘 받은 군사였다.
베스파시안은 유력한 전략가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두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전략을 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험한 산맥과
골짜기에서 게릴라전략을 폈다. 그리고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든 항구를
막았고 예루살렘의 전지역을 포위하였다.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전략을 폈다.
그러나 주후 69 년경 베스파시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위해서 전쟁준비를 그만두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루살렘 포위작전의 남은일은 그의 아들 디도(Titus)에게 넘겨
주었다.66
역사적으로 볼 때 그당시 예루살렘에 살고있던 유대인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또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다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들이 믿는 일이면 목숨을 각오하고 행한다. 이것이 이들의 용기이기도 하다.
주후 70 년경 4 월에 디도는 로마군인 6 만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쌓아놓은 방위대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9 월까지 끌고 갔다. 9 월에 시작된 전쟁은 치열하였다. 2 만 5 천명의
유대인들은 용감하게 로마군인들과 싸웠다. 이러한 전쟁 가운데 무자비하게 목숨을 잃은
시민들도 또한 많았다. 예루살렘 지역에 사는 많은 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브(Av)달 9 일에 헤롯성전이 불에 타 무너졌다. 아브 9 일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날이기도 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우연한일이기도 하다. 유대인
로마전쟁은 또 한번 유대인들의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이들에게 또 한번의 성전파괴라는
현실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 한번 예루살렘은 페허가 되버리고 말았다.
비록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도 세 군데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헤로디움(Herodium)도 얼마 못가서 무너지고 마케루스(Machaerus)도 로마군인들에게
몰락되었으며, 이제 남은곳은 맛사다였다.
맛사다는 도시가 아니라 헤롯대왕이 건설한 산성이었다. 맛사다는 높이가
1300 핏트가 되며 유대 사막지대와 사해바다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맛사다에는
셀롯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셀롯파의 지도자는 므나헴(Menahem)이였으며 그는
셀롯파를 설립한 갈릴리안의 유다의 아들이였다.
므나헴이 예루살렘 전쟁에서 목숨을 잃자 그의 조카인 엘이아사 벤 야이어(Eleazar
ben Jair)가 주도권을 가지고 맛사다를 지켰다. 사실은 셀롯파들은 로마국에대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들의 숫자는 소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볼때에 셀롯의
독립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셀롯파를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주후
74 년경에 로마장군 플라비우스 실바로 말미암아 맛사다는 로마인에게 넘어갔다.
로마군인이 맛사다에 올라왔을때 셀롯파들은 다 죽어있었다.
로마인들이 맛사다에 올라가서 본 것은 무엇인가? 로마군인이 올라 왔을때 그당시
약 960 명의 셀롯파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자, 여자, 아이들로 구성 되어있었다. 이들은
로마인에게 항복을 하기보다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목숨을 끊은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자살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군인들의 포로들에 대한 잔인한 행위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 로마군인들은 포로를 그자리에서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 그리고 노예로 팔린자들은 거의 콜로시움에서 칼싸움을 하는 자로 죽는다.
또는 사자들의 밥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면에서 셀롯파들은 자신들이 직접
목숨을 끊는것을 택했다.
이러한 유대인로마전쟁에 대해서 기록을한자는 유대인인 요세푸스(Josephus,
주후 37-100)였다. 그는 유대사를 쓴 자였다. 그는 하시모니안 왕가의 제사장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나중에는 바리새인파들과 연관을 맺었다. 그도 역시 유대인들의 반란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포로로 잡혀간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와서 자유의
몸을 되찾았으며 또한 로마인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로마제국에서 인정을 받는 지위 있는 자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위치에서 유대교의 역사및 전통에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특히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잘 해석 해놓기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두번째 성전의 파괴이들의 디아스포라의 삶의
시작이기도하다. `디아스포라’의 의미는 `예루살렘밖에 사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주후
70 년경을 디아스포라의 시초로 보고있다. 역사적으로 디아스포라의 기간은
2 천년동안으로 보고있다. 이스라엘나라가 재건된 1948 년을 디아스포라의 끝으로
보고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지방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은 유대지방에서 다시 삶을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디아스포라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앗수르왕때 포로로 잡혀간
무리들도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이제 유대인들은 유대지역을 비롯해서 로마제국,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와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성전의 존재성은 이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성전파괴로 말미암아 이제 유대인들은 이들이 있는 곳에서 신앙의
중점을 찾아야만 하였다. 디아스포라중에서도 많은 자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각주 Endnote s
1유대인의 헬라화(Hellenism)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상업과
무역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에 있어서 헬라의 정신과 종교를 받아드리는 것에 있어서
갈등이 있었다. 완전히 헬라화 되는 상류층은 전통적인 유대교에서 벗어났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이 구릅에
속했다. 바리세인들과 실롯당들은 완전히 헬라문화에 동화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헬라화는
필연적이었다.이미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나라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다. 헬라어, 아람어, 히브리어등이 었다.
Henry Jackson Flanders Jr., People of the Covenant: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Fourth e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 467.;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 ed. R. J. Zwi
and Geoffrey Wigoder Werblowsk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315-6.
2 이 시민전쟁을 마카비전쟁(Maccabean Revolt)으로 불리우고 있다. 주전 175-135 년경을 마카비 시대 또는
하시모니안왕조 시대라고 부른다."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p. 432-3.
3 헬라화 특징 중 하나는 도시국가문명(polis or Greek City-State)였다.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헬라어와 문화를 도입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연무장(gymnasium)을 통해서 군사훈련을 시켰고 그 외에도
교육기관, 경주장, 극장, 음악당, 학원, 정치회장소로 사용되면서 도시국가 문명을 실천했다. 또 이들은
뛰어난 건축가였으며, 조각가, 시인, 음악가, 극작가, 철학자, 토론자들이었다. 이들이 머무는 곳 마다 경제가
번영했고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Paul Johnson, A History of the Jews (San Francisco: HarperPerennial, 1987).
P. 97.
4 레갑(Rechab)은 주전 841 년경에 살았던 자이다. 이의 아들 여호나답(Jehonadab)은 신앙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우상숭배를 반대한자로써 인정을 받았던 자였다. 레갑의 상징은 반문화주의자를 말한다. Flanders Jr.
p. 335.
5 참조. 행 6 장.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에서
출생하여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를 말하며 히브리 사람들은 팔레스틴에서 출햇아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톰슨성경(신약), P. 196.
6 사두개인들의 원조는 주전 200 년경 두번째 성전시대로 올라간다. 이름의 시조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사독’(Zadok)으로 보고 있다. 사독은솔로몬왕정시대때 예루살렘의 대 제사장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매우 부했으며 귀족에 속했다. 신앙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었다. 특히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으며 또한 영혼 불멸을 부인했다. 그리고 율법에 있어서 구전법(Oral Laws)을 부인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강조했다. “Sadducee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 P. 600.
7 히브리어로 ‘브르쉼’ (Perushim)이며 의미는 ‘분리된자’이다. 이들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주전
200 년경으로 보고 있다. 바리세파들은 하시딤파하고 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들은 구전법과
기록된율법을 동시에 믿는다. 특히 육체의 부활과 영혼 불멸을 믿는다. 그리고 자유의 의지(Free Will)을
믿었다. 이들의 신앙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당시에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또한 애국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특히 시민전쟁때(마카비 전쟁)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다.
Ibid.pp. 528-9.
8 유대교에서 가장 높은 기관이었다. 특히 로마시대당시 종교적, 정치적, 입법적, 행정적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름은 헬라어에서 나왔다. Ibid., 606-7.
9 프톨로미(Ptolemy, 301-198?)는 처음에 팔레스틴을 소유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왕조를 이어났다. 이
왕조때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이동시켰다. 그 관계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왕조시대때 유대교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었다. 이것은 칠십인 번역(Septuagint)를
편집한것이다. Everett Ferguson, Background of Early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7). pp. 320-1.
10 셀루쿠스왕조는 주전 198-167 년경으로 보고있다. 왕조의 나타남과 마카비안전쟁과는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마카비전쟁때 세루쿠스와들은 다음과 같다: Antiochus III (223-187); Seleucus IV Philopator (187-175);
Antiochus IV Epiphanes (175-164); Antiochus V Eupator (163-2); Demetrius I Soter (162-150); Alexander I Balas
(150-45); Demetrius II Nicator (145-139); Antiochus VI (and Trypho); Antiochus VII Sidetes )138-129). Daniel J.
Harrington, The Maccabean Revolt: Anatomy of a Biblical Revolution (Wilmington, Delaware: Michael Glazier,
1988). Pp. 88-9. 안티오커스 3 세(223-187)는 평화를 가지고 왔고, 그의 아들 셀루쿠스 4 세(187-175)부터는
유대인과 관계가 악화되가기 시작했다. 그의 후계자인 안티오커스 4 세(175-163)는계속해서 공포와 위협을
가져 왔다. Flanders Jr.pp. 468-9.
11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자칭해서 이름을 ‘에피파네’(Epiphanes)라고 불렀다. 에피파네의 의미는 ‘신의
나타남’ (god manifest)이다. Flanders Jr., p. 469.
12 유대교에서 오니아는 순결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있음. 특히 마카비왕조는 오니아를 그들의 조상으로
보고 있음. “Judas (Maccabees) is identified with Onias in this epitome and is presented as the successor of the
Oniad lineage.” The Books of the Maccabees: History, Theology, Ideology, ed. Geza G. Xeravits and Jozsef
Zsengeller (Leiden and Boston: Brill, 2007). P. 17.
13 제이슨은 안티오커스에게 뇌물을 주고 제사장직을 얻었다. 그는 주전 175-72 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다.
참조. 2 마카비 4:8. 안티오커스는 그에게 대제사장직을 허락했다.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ed. Louis
Finkelstein W.D. Davies, vol. I: Introduction; the Persian Period; II: The Hellenistic Age; IV: The Late Roman-
Rabbinic Perio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II., p. 279.
14 그는 대제사장 오니아의 동생으로서 주전 172-163 년경까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이었다. Harrington.
P. 15.
15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Ch . p. 286.
16 이 시대를 유대인 국군의 발생및 국가에 대한 의식을 갖은 때로 봄.이러한 정신은 디아스포라 직전 까지
였다. Doron Mendels, The Rise and Fall of Jewish Nationalism (New York and London: Doubleday Press, 1992). P.
161.
17마카비전쟁 또는 반란의 성경의 자료는 다니엘서, 마카비 1,2 에 나와있음. 마카비전쟁시대는 역사적으로
주전 167-134 년으로 보고 있음. 마카비전쟁에 개입한 자들은 유다, 요나단, 시므온으로 보고 있음. Walter C.
Jr. Kaiser, A History of Israel (Nashville, Tennessee: Broadmand & Holman Publishers, 1998). P. 469.
18 맏타티아는 모딘(Modine)지역(오늘날 예루살렘북서쪽에 위치해잇음)의 출신의 제사장이였으며 그의
가족을 하스모니아(Hasmoneans)가로 부름. 그는 수리아왕명인 헬라신에게 절하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왕의 대사를 죽이고 세벨라지역으로 그의 아들 다섯과 도망하였다. 그곳에서 다른유대인들과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게릴라전쟁이기도 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하스모니’이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시므온’이며 부친은 ‘요한’으로 알려져 있음. 맏타티아에게 다섯아들이 있었다:
요한(John) , 시므온 (Simeon), 유다 (Judah), 엘리에셀 (Eleazar), 요나단 (Jonathan). 역사적으로 맏타티아의
별명이 ‘하스모니’(Hashmonay)이며 그의 손자 유다의 별명이 ‘마카비’ (Maccabeus)이다. Ibid.
19 하스모니안 왕조의 시대는 주전 135-63 년경으로 보고 있음. 하스모니안왕조계열을 계속해 보며는 Simeon
(Simon) (142/1-134) John Hyrcanus I (134-104); Aristobulus I (104-103); Alexander Janneaus (103-76); Salome
Alexandra (76-67); Aristobulus II (67-3); Hyrcanus II (63-40) Ibid.p. 447, 479.
20 참조. 1 마카비 3:1-9:22. 유대역사는 유다를 능력있는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음.
21 참조. 2 마카비 10: 6-8.
22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보며는 항상 대다수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수라 할
지라고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23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P. 313.; 요나단 역시 유다를 뒤를이은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요나단의 장점은 정치였다. 그는 로마와 정치를 통해서 영토와 지역을 넓혀나갔다. 사실상 마카비 전쟁은
유다가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 이제는 정치로서 나라를 다르려야 했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요나단은 필요한
인물이었다. Harrington. Pp. 76-80.
2424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P. 318. 시므온이 대제사장이 될 당시 유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트리폰(Tryphon)은 요나단을 학질로 삼고 유대를 정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인 엘리에셀, 요한,
유다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 당시두개의 파가 있었으며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있었다. 긍극적으로
왕의 인준으로 말미암아 시므온이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떄는 주전 140 년 9 월이었다.; Harrington. P.
80.
2525 암살자는 그의 사위였던 프톨로미였다. 프톨로미는 시므온과 그의 두 아들 유다와 맏타티아를 여리고에
있는 독성(Castle of Dok)에서 살인했다(주전 134 년경).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p. 320.
26 참조. 1 마카비 13:53. 마카비 1 권이 힐카누스 일세 때 기록되었음. Mendels. P. 35.
27 아리스토불르스의 모친은 알렉산드라(Alexandra)였음. 그녀는 헤롯왕에게 그의 아들이 대제사장직을
맡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헤롯은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며느라인
미리암(Miriam)을 제사장으로 삼았다. Ibid., P. 283.
28 알렉산더가 왕계를 계승할때는 주전 103-76 년경이다. 그는 유대왕 처음으로 동전을 만든 왕이다. Ibid. P.
62.
29 안티파타는 그 당시 이두메아의 총독이었다. 그리고 헤롯대왕의 부친이었다.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p. 347.
30 안티파타의 출신은 남유대지방인 에두메아(Edumaea)이었다. 그가 유대교로 개종한것은 유대역사에 큰
영향을 가져다 주었음. 안티파타는 나중에 독약암살로 죽고 그의 그 아들 브사헬과 헤롯이 예루살렘과
갈릴리지방에 통독으로 다스린다. Cecil Roth, A History of the Jews: From the Earliest Times through the Six
Day War (1971). Pp. 93-94.
31 헤롯은 반 유대의 피가 섞여진 에두메인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신임을 얻고 이스라엘에 속국왕이 됨.
David M. Rhoads, Israel in Revolution 6-74 C.E. (Philadelphia, Pennsylvania: Fortress Press, 1976). P. 23.
32 참조. 마 2:3.
33 B. K. Rattey, A Short History of the Hebrews from the Patriarchs to Herod Ther Great, ed. Rev. by P. M. Biny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P. 130.
34 헤롯의 정치수단이 잘 나타난다. 그는 마크 안토니의 위해서 왕이 되나 인준은 안토니의 원수인 시저
아우구스도스(Caesar Augustus)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Mark Allan Powell, Introducing the New Testament: A
Historical, Literary, and Theological Surve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P. 27.
35 헤롯은 유능한 정치가로서 절때로 능력있는 제사장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디아스포라중에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이로말미암아 제사장직은 이제 정치권아래로 머물게 되었다. Mendels. P. 285.
36 헤롯은 자신이 유대의왕과 유다의 왕이 되기를 바랬다. Ibid. PP. 284-5. 그에게는 어떻한 경쟁자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유대왕)의 탄생은 그에게 있어서 위협이 되었다. 참조. 마 2:4. 헤롯은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것인가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물음은 그의 직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37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호의정책을 사용하였다.
38 헤롯왕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중요함을
안 헤롯은 많은 투자을 했다. Mendels. P. 285.
39 참고문헌 34 번을 보라.
40 전설에 그는 그의 아내의 혼에 일생을 시달렸다고 한다. Powell. P. 27.
41 Ibid.
42 아케라우스는 헤롯이 백성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낮추어 달라는 요구를 무시했으며 이로인해 생긴 반란을
군대를 풀어서 진압했다. 3000 명의 백성을 목슴을 잃었다. 이후로 계속해서 시민반란들이 일어났음.
Rhoads.pp. 25-6.
43 안티파스의 통치기간은 주후 4-39 년경이다. 그는 갈릴리지방과 브레아지방을 통치하였다. Powell.p. 28.
44 막 6:14-29.
45 전설에는 그가 불란서로 망명갔다고 말한다. “Antipas, Herod”, "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cMillan, 1993). III, pp. 75-6.
46 아그리파는 주후 37-41 년경 갈릴리지역을 다스렸으며 주후 41-44 년에는 팔레스틴온지역의 분봉왕으로
있었다. 그는 사도행전 25:13-26:32 절에도 나오는 왕이다.
47 그가 주관한 지역은 유대북쪽땅이 었으며 살고 있던 민족은 다민족이었다. 그는 헤롯왕조의 마지막
남자의 후계자이다. Roth. pp. 99-100, 112.
48 사독의 후손들인 사두개인(Sadducees)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였으며 또한 귀족의 제사장을 의미함. E. P.
Sanders, Judaism: Practice & Belief 63 Bce-66 Ce (London: SCM Press, 1992).
49 Roth. P. 112.
50 바리세인의 유대사에서 처음 언급은 마카비반란때 나오는 요나단(주전 161-143)시대에 나온다.Sanders. p.
381.
51 참조. 마 23:23-24.
52 Powell. P. 19.
53 Ibid. p. 20.
54 Ibid.
55 세례요한이 한때는 엣센스파에 속했었다. 그러나 엣센스파는 신약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Ibid.
56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역사적인 인물로 보나 메시야로는 아직도 믿지 않는다. 물론
57 예수님의 탄생과 돌아가심에 대한 년대는 많은 견해가 있음. 보편적으로 주전 4/5 에서 주후 30 년으로
보고있음.
58 예수님의 12 사도들 모두 유대인들었다. P. 318.
59 참조. 행 22:3.
60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알려져있다.
61 Mendels. P. 294.
62 힐렐은 바리세파의 지도자로 있었으며 샤매는 바리세파법정을 지도하고 있었음.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p. 272.
63 Ibid. pp. 245-54.
64 그는 주후 26-36 년경 유대지역을 총괄하였다. 그는 가이사를 섬기는 총독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증오했으며 또한 유대교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Powell. P. 28.
65 이 반란의 시기는 주후 66 년경이며 일어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닌 가사리야(Caesarea)였다. Johnson., p.
136-7.
66 베스파시안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 주후 69 년경 로마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 디도가 그의 직분과 요지를
어어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의 때는 주후 70 년이다. Ibid. p. 137.
참고문헌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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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ellion for Religious Freedom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역사에 나타남은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mixed blessing 이었다.1 헬라문화는
유대인들에게 긍정적인 혜택도 있었으며 또한 부정적인 문제도 가져다 주었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러한 변화들은 자극을 일으켰다. 헬라문화를 따르려는 파들이
생겨났고, 옛 모습의 유대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tension 은
마침내 시민전쟁을 불러 일으켰다.2 여기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막강하였다. 그 당시 지도에 알려진 세계를 정복한
헬라인들은 이들이 가는 곳 마다 식민지를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정복한 도시들의 이름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인디아 또는 이집트의
도시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이 있다.3 헬라정복자들은 가는곳마다 또한 교육,
문화, 종교에 관해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 사용은 매우 중요했다.
헬라어는 이제 세계적인 언어가 되었다. 특히 사업과 문화교류에 있어서 헬라어는
필수적인 언어였다. 성경의 신약이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사실만으로 보아도 헬라어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헬라문화의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이제 예루살렘을 둘러싼 모든
도시들은 헬라문화의 도시로 변했다. 이제 유대인의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자체도
헬라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에 있어서헬라 문화를 누구나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헬라문화가
유대에 들어왔을때 반응은 다양하였다. 어떤 유대인은 헬라문화를 온전히 다
받아들였으며, 다른이는 문화를 떠나 사막으로 옮겨간 이들도 있었다. 사막으로 간 자들은
르갑인(Recabites)의 가르침을 따랐다.4
르갑인들은 예루살렘은 타락했다고 믿고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참
유대교를 지탱하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참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면 사막에
나가서 살면서 떠돌이 생활을 할때에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헬라문화를
배척한자들은 사막으로 떠나가서 거기서 유대교를 지켰다.
유대교안에서도 헬라파와 유대파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도 잘
묘사되어있다. 기독교가 세워진 후에도 이 두파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5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쪽은 유대인들중에서 상류에 속한자 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교육 수준 또한 높았다. 또는 제사장후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은
헬라문화를 받아 들여야만 미래가 있다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름을 고쳐서 헬라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서나 친지들 끼리는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일에서도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헬라문화를 배척한자들 또한 이유가 많았다. 이들에게 헬라문화는 저주였다.
그것은 헬라문화가 주는 장점도 있었지만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점이 배척한 첫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헬라가 주는 문화는 세속적이었으며 또한 가치관에 있어서도 유대교와
매우 달랐다. 그래서 이들의 결과는 헬라문화와 유대교는 결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정부에다가 세금을 낼 정도로 더 이상 타협하지 않았다.
유대교에서 역사적으로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파를 `사두개(Sadduesses)파’6라고
하며 그와 반대로 문화를 배척한 파를 `바리새(Pharisees)파’7라고 부른다. 이들의 이야기는
성경에서도 매우 자주 나타난다. 사두개파에서는 제사장들과 소위 지도자측에있는
선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파중에서는 정통보수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다.
사두개인들의 영향은 클 수 밖에 없었다.이들은 우선 상류층에 있었던
자들이었으며, 또한 교육도 많이 받은 자 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 진출 및 헬라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중의 많은 자들이
제사장이어서 결과적으로 이들이 산헤드린(Sanhedrin)공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산헤드린은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높은 공회였다. 여기에서 유대교의 모든 것들이
결정되었다.8
이때에 다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개혁운동이었다. 개혁운동은 유대교를
빨리 헬라화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대교를 헬라문화에 맞춰서 지킬것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이유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많은 자들이 이제는 히브리어보다는 헬라어가 더
편했으며 자녀들은 헬라어만을 사용했다. 그래서 개혁운동을하는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까지도 했다. 그리고 구두로 내려오는 전통은 다 배척하였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매우 빨리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자 들에게 퍼져나갔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 년에 죽고나서 그의 제국은 갈라졌다. 그리고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게로 넘어가지않고 그의 3 명의 장군들에게 나뉘어졌다. 장군들의 이름들은
안티고노스, 셀루세스, 프톨로미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은 프톨로미였다.9
그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한 헬라문화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는 선정을 하지 못했고 그의 제국은 셀루세스왕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10
기원 전 199 년에는 셀루세스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었다. 셀루세스왕국은
시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셀루세스왕국의 정치는 반 유대교적이었다. 유대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헬라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했다.
기원전 175 년은 유대교에 있어서 매우 고난의 해였다. 셀루세스는 암살을 당하고
그의 동생인 안티오커스 4 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 세(Antiochus Epiphanes IV)로 불린다.11 그는 시리아왕족의 후계로써 헬라문화를
압도적으로 유대교에게 강요하였다. 그가 왜 그렇게 헬라문화를 강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견해가 있다. 어떤 주장은 그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또는
그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부친이 유대인들을 헬라화 시키는데 부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여러가지의 해석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유대교를 타겟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 3 세(Onias III)12를 그의 동생이였던
제이(Jason)슨으로 바꾸었다.13 (제이슨 이름의 의미는 여호수아임). 제이슨은 곧 바로
유대교를 헬라화 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티오커스의 생각에는 제이슨이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안티오커스는 다시한번 제사장을 바꾸었다. 그는
메네라우스(Menelaus)로 대제사장을 바꾸었다.14 유대교에서는 이제 막강한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위기가 왔다.
엄한 법을 통해서 메네라우스는 유대교를 헬라화 해 나갔다. 이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불법이 되고 말았다. (유대교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불법이었다. 법을 어긴 자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의
부모들은 남자아기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 금지를 당했다.15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율법 대신에 세속적인 법을 내 세웠다.
그리고 성전안에 제우스신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유대교는
혼합종교에 속해 버렸다. 이러한 모습을 본 헬라파 유대인들은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개혁의 이름으로 세속화 되가는 유대교를 더이상 그대로 지켜 볼 수 없었다. 안티오커스의
정책은 이제 지지자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에 보수파 유대교의 지지자들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하였다.16
마카비안의 반란이 이때에 일어났다.17 기원전 166 년에 시리아 장군이 모딘을
정복하였을 당시에 그곳에다가 제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제단앞에서 성경에서
금하는 짐승들을 제사물로 드렸다. 이때에 반기를 든 가족이있었다. 이 가족의 이름이
맏타티아 하스맨(Mattathias Hasman)이였다.18
맏타티아의 반란으로 유대교에는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 일어났다. 맏타티아는
유대교에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왕국을 세웠다.19 이것이
마카비였다. 마카비왕족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특히 맏타티아가
죽은후 그의 아들인 유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20 유다는 시리안 군대와 전쟁을 통해 많은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165 년에는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하였다. 그리고
성전을 다시 깨끗케한후 제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다시한번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손에
들어오게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기를 만들었다.21 이 절기는
하누카라고부른다. 또는 “헌신”이라고도 부른다. 하누카(Hanukkah)의 의미는 성전을 재
헌신한다는 뜻(Rededication of the Temple)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성전을
재 헌신하기 위해서는 촛불을 켜야하는데 그당시 성전에는 기름이 많이 있지 않았다.
찾아본 결과 하루 촛불을 켤 수 있는 만큼의 기름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밖에서 기름을
가져오는 데 6 일이 걸렸다. 그러나 새 기름을 가져오는 동안에 하루밖에 쓸 수 없는
기름이 8 일이 갔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탈무드에서는 언급이 되어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하누카절기를 지키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누카는
기쁜날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 헌신하는 날이었으며, 또한 유대교에 있어서 자유를
얻은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대교 역사가들은 하누카는 첫번째 유대교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눅카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외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으며 또한 작은 숫자로써 막강한 군대를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자들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다는 교훈도 포함된다.22
하시모니안 왕가는 몇년을 평화스럽게 유대땅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기원전
161 년경에 또 하나의 일이 터졌다. 이번의 일은 새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이었다. 유다는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력으로 임명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리아군인들이 더 강했다. 그리고 새로운 장군이 임명되었다. 새롭게
뽑힌 장군과 더 많은 군인들은 유대를 장악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유다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23
요나단은 로마제국과 손을 잡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로마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정치를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매일
있는 일들에 대해서 방치해 두었다. 기원전 152 년에는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약 100 년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요나단이 죽고 나서 그의 동생인
시므온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24
시므온은 맏티타스의 마지막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인들로 부터 세금을 면제받는
혜택을 얻어냈으며 유대지방의 자체 행정을 계속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가서 기원전 134 년경에 그의 사위였던 프톨로미에게 그의 두 아들들과 함께 암살을
당했다.25 이것으로써 마카비안왕족이 여기서 막을 내린다.
하시모니안왕족은 반응의 정신을 주장한다. 특히 이들의 생존의 목적은 유대교를
순수한 종교로 이끌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남의 나라를 정복하려거나 또는
이들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순수한 유대교를
유지하기위해서 종교적인 전쟁을 한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교를 배척하는 자들을
이해하였고 또한 유대교를 전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므온이 죽은 후 아들 요한 히카누스(John Hyranus)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26 요한은 기원전 104 년까지 하시모니안 왕족을 지키면서 유대인들을
다스렸다. 그는 그의 사명이 다윗 왕족을 다시 건립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는 또한
사마리안들과 전쟁을 벌였다. 요한이 죽은후 왕족은 매우 약해져있었다. 요한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I)가 대제사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그의 모친이 주관하였다.27
아리스토불루스는 이것이 못 마땅하여 그의 모친을 감옥에 가두고 그녀가 죽을때까지
그곳에 놔두었다. 그리고 왕권을 유지하였다. 그는 그리고 일년 후에 죽고 만다. 지금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은후 왕권은 그의 동생에게로
넘어간다. 동생의 이름은 알렉산더 아네우스(Alexander Jannaeus)였다.28
알렉산더가 직위에 올랐을때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그리고
오만명의 유대인들이 목슴을 잃었다. 그는 그에게 반항한 자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함으로 그의 원수에 대한 대우를 잘 보여주었다.
기원전 76 년에 알렉산더가 죽은후 왕권은 그의 아내였던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에게 넘어갔다. 살로메는 바리새인들과 화합을 맺고
유대땅에 화평을 가져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자식 3 명이 왕권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내적투쟁은 하시모니안왕족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하시모니안왕족의
팔레스타인땅의 정복은 안티파타(Antipater)에게 넘겨졌다.29 안티파타는
하시모니안왕족시대에 강제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63 년경에
유대지방의 감독으로 로마제국으로 부터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두미안이라는 것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30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헤롯(Herod)이
그의 직위에 올랐다.31
헤롯은 성경에 나오는 자이다.32 그는 헤롯대왕으로도 알려져있다. 기원전 37 년 전
부터 주후 4 년까지 유대땅을 치리한 왕이다.33 그의 친구로서는 마크 엔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있으며 이들의 친분관계로 말미암아 헤롯은 유대지역을 장악 할 수
있었다.34 그리고 나중에 유대지역에서 왕이라는 타이틀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대제사장의 직분을 이어 받을 수 는 없었으므로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35 그는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대지역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였다.36
헤롯의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였다.37그는 산헤드린공회를 다시
세웠으며 또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헤롯의 가장 중요한 업적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 설립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성전을 두번째 성전으로 칭하고 있다. 첫번째의
성전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을 이야기 하며, 바벨론의 침략으로 기원전 586 년경에
무너졌다가 에스라와 스룹바벨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재건 되었으며 두번째 성전을
건설 한것이 이 헤롯성전 또는 두번째 성전이라고 한다.
헤롯은 성전건설에 매우 많은 관심과 열심을 쏟았다.38 그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멋있는 성전을 세울 결심을 하였다. 오늘날 예루살렘 서쪽 벽(Western wall:
유대인들이 지금도 이벽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다.)은 헤롯성전의 발코니였다.
헤롯은 그 외에도 많은 신도시를 개발하였으며 많은 곳에다가 기념할 만한 건물들도
세웠다. 그는 카세라항구에 유명한 항구도시를 세우고 지중해에서 오는 무역상인들과
무역을 하였다. 군사적인 위치에서도 그는 많은 곳에 군사기지를 짓고 벽을 쌓기도
하였다. 유명한 마사다도 헤롯이 세운곳이다. 맛사다는 높은 고지에 있는 산을 군사기지로
변형해서 적군을 막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헤롯은 슬기로운 정치가였다.39 그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자였다. 그리고 그의
섬기는 로마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안목도 가졌으며
또한 매우 가혹한 자이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아무도 그를 반대할 자가 없도록
만들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에게는 적을 살려두지 않았다. 한때는 제사장이
세속적인 법을 모세법으로 인용하였을때 헤롯은 제사장들을 다 몰살하였다. 그는 사람을
의심하는 병이 있었다. 특히 아직도 살아있는 하시모니안직계에 대해서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은 하시모니안직계들을 다 몰살할 계획을 가졌다. 여기에 속한
직계중에는 헤롯자신의 직계도 포함되었다.
헤롯은 열번 이상 결혼을 하였다. 그중에 하시모니안에 속한 부인을 두게 되었다.
헤롯은 이 부인을 살해하도록 하였다.40 이 부인의 이름은 마라암이었다. 마리암은 요한
히라카누스의 손녀딸이었다. 이렇게 헤롯은 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직계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을 다 몰살하였다. 그의 자식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헤롯은
하시모니안직계를 남겨두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는 정신분열증을 앓은 자 였다고
기록한다.41
주후 4 년경에 헤롯이 죽자 그가 다스렸던 곳은 그의 세 아들로 말미암아
나누어진다. 아케라우스(Archelaus)는 헤롯의 아들로서 주후 6 년경까지
팔레스타인지역을 다스렸다. 그가 직위에서 내려오게 된 이유는 시민들의 호감을
사지못했기 때문이였다.42 그리고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로마군이 직접 통치하였다.
헤롯의 다른 아들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였다. 그는 갈릴리와
페라야지역을 치리하는 분봉왕이었다.43 그는 성경에 나오는 자 로서 세례요한을
죽인자로 기록되어있다.44 성경에서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그의 동생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지적하였으며 헤롯은 이 일로 세례요한을 죽이게
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주후 39 년경 로마황제 칼리굴라의 명으로 사라졌다.45
헤롯의 장자였던 헤롯 아그리파(Herod Agrippa I)일세는 팔레스타인 북쪽지방을
능력있게 치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후 44 년경에 죽었다.46 헤롯대왕의 차자는 헤롯
아그리파 2 세로 불린다. 아그리파 2 세는 약했으며 그가 즉위한 후 얼마 못되어
로마인들에게 정복을 당한다.47
바리새인과 사두개인파의 등장으로 헤롯대왕때에 분열이 생겼다. 헤롯대왕때 당시
유대교는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번때는 사두개인(Sadducees)파이며 두번때는
바리세인(Pharisees)파이며 세번때로는 엣센스(Essence)파이다. 이 세파들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두번째 성전때를 능가한 파는 오직 바리새인쪽이었다.
사두개인들은 히브리어로써 대제사장 사독(Zadok)의 이름에서 나온것이다.
대제사장 사독은 다윗왕과 솔로몬왕때에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자였다. 사두개인들은
이렇게 제사장직계에 속한자들이었으며 또한 양반의 가문의 후계들이었다.48
사두개인들은 말로 내려오는 전통을 믿지 않았으며, 오직 율법은 기록된것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의 변화를 인정하지않았다. 사두개인들의 율법해석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좁게 해석하였다.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오직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였다. 주후 70 년경에 로마인들이 두번째 성전을 파멸했을때 사두개인들도
사라져 버렸다.49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보다 숫자적으로 훨씬 많았다.50 역사적으로
헤롯대왕때를 기준하여 당시에 약 6 천명 가량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리새인들의 의미는 “구별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보통사람들 사이에서
구별되어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주장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말로내려오는
전통과 모세의 율법을 다 믿고있었다. 이들역시 보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51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를 대중화하였다.52 그리고 대중들이 유대교를
지킬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대교가 특별한 직위에 있는 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대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엣센스파는 매우 과격한 유대교었다.53 어떤이들은 바리새인의 과격한 쪽을 택한
자들이었다. 엣센스들은 유대교를 전념으로 지킨자들이였다. 특히 남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은둔생활과 신비 주의를 믿고 있었다. 이들은 독신주의를 서약한다.54 물론
결혼한 형제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독신주의를 주장한 것은 영적인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엣센스파들은 음식도 조심해서 먹었다. 이들은 음식의 법을 엄하게 따랐다.
이 음식법을` 카스르(Kahrut)’라고 부르며 오늘날에는 유대교의 음식법을
`코셔(Kosher)’라고 부른다. 코셔음식은 구약에 나오는 엄한 음식법에따라서 만들어진
것을 이야기한다.
나사렛 예수님(Jesus of Nazareth)이 팔레스타인 땅에 계셨을때 엣센스파들은
활약을 많이 하고 있었을때였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엣센스파들과 접촉을 하고 계셨다.55
예수님은 나사렛지방에서 자라셨으며 자라온 많은 시간을 갈릴리 지방에서 보내셨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으며 성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로 나타나셨다.56 예수님은
평범한 자들을 제자들로 삼으시고 병든자들, 가난한자들, 마귀에 들린자들을 고치신
메시야이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외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고 또한 많은무리가 따랐지만 유대교의
지도자들 층에서는 많은 미움을 사셨다. 주후 30 년경에 예수님은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57 죄명은 유대교의 법을 어긴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후에 다시 부활하였다고 가르치고 전도한다.
역설적으로 처음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다 유대인들이었다.58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에는 유대교와 함께 존속하였다 기독교의 가르침, 예배형식, 법과 풍습은 유대교에서
나왔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역시 다소(Tarsus)에서 온 유대인이었다.59 그는 유대인이
아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60 그리고 이렇게 전파된 복음은 세계에 널리 퍼져나갔다.
학식을 갖춘 자들이 바리새인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학자중에서는
힐렐(Hillel)과 샤매(Shamaiah)가 있었다.61 이들은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기울어진
자들이었다. 주후 100 년경에는 힐렐학파와 샤매학파가 존속하였다.62
샤매학파는 장로 샤매가 설립한 학파로써 기원전 50 년 부터 주후 30 년까지 살았다.
샤매는 지혜가 풍부하고 성격이 매우 급한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토라)에서 나왔다. 그의 해석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특히 성결에 있어서 그는 매우 관심을 많이 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 록 샤맨학파는 사두개인파처럼 유대교에서 사라져 버렸다.
힐렐학파 역시 모세의 율법을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했다. 힐렐은 (30 B.C.-A.D. 10)
샤매와 항상 경쟁을 이룬자 였다. 힐렐은 또한 힐렐 바벨론 (Hillel Babylon)으로도
알려져있다. 유대교의 전통에 힐렐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는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전해졌다.63
유대교에게 큰 영향을 준 힐렐은 주후 400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또
유대교에 대해서, 힐렐이 유대인들이 아닌자 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타 종교에 있는
자들이 유대교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쉽도록 만들어 놓았다.
주후 6 년경부터 41 년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을 7 구역으로 나누어서 로마국이
치리하였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7 구역가운데 한 구역을 치리하였다.64
유대지방은 이렇게 하여 로마인들로 부터 보호를 받으며 이들의 치리 아래에 있었다.
로마국 역시 유대인들의 법이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인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세금을 잘 내고 로마국의 정치에 피해를 안 주면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방치로 말미암아 무질서해졌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자주 마찰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마찰은 로마국의 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국의 통치아래있던 유대인들로 인해서 반란이 일어났다.65 이 반란은 로마국의
불 공평한 세금제도때문이였다. 이 반란은 두 명의 유대인 지도자들의 주동으로
펼쳐나갔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로마국에세금을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반란을 억제하였다. 이런일이 난 후 부터는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엄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패배, 그리고 억제당함은 팔레스카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서 계속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여기에 처음 반란의 지도자들의 이름은 갈릴리인 유다(Judas the Galilean)와
바리새인인 사독(Zadok the Pharisee)이었다. 여기에서 갈릴리 유다는 나중에 열정파라는
이름을 가진 셀롯(Zealots)파의 시조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질롯트파는 이스라엘의
애국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중에서도 셀롯이라하는 시몬이 있다.
유대인들의 반란은 거의 소규모의 것들이었으나 주후 44 년경에 일어난 반란은
매우 심각했다. 이 반란도 로마인들에게 탄압되었지만 생명을 잃은 숫자들은 천명이
넘어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거대한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 반란의 이름이
유대인의 로마와의 전쟁(the Roman Jewish War of 66-70 A.D.)이다.
이 유대인의 로마전쟁의 원인은 행정적으로 시작되었다. 카세리아지방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사이에 생긴 마찰로 벌어졌다. 그당시 카세리아지방은
팔레스타인구역의 로마행정국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당시 행정관이었던 세시우스
프로러스는 이방인들의 편을 들고 유대인들을 진압하고 예루살렘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무자비하게 못박아 버렸다. 이러한 로마국의 대한 행태는
유대인들을 자극하였다.
유대인들은 힘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군인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에 새로운 군대를 보내었으며 이번에도 또 유대인들이
로마군인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에서 새로운 장군과
군단을 보냈다. 장군의 이름은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Flavius Vespasian) 이었다. 이번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군단은 로마제국에서 훈련을 잘 받은 군사였다.
베스파시안은 유력한 전략가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두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전략을 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험한 산맥과
골짜기에서 게릴라전략을 폈다. 그리고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든 항구를
막았고 예루살렘의 전지역을 포위하였다.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전략을 폈다.
그러나 주후 69 년경 베스파시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위해서 전쟁준비를 그만두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루살렘 포위작전의 남은일은 그의 아들 디도(Titus)에게 넘겨
주었다.66
역사적으로 볼 때 그당시 예루살렘에 살고있던 유대인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또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다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들이 믿는 일이면 목숨을 각오하고 행한다. 이것이 이들의 용기이기도 하다.
주후 70 년경 4 월에 디도는 로마군인 6 만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쌓아놓은 방위대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9 월까지 끌고 갔다. 9 월에 시작된 전쟁은 치열하였다. 2 만 5 천명의
유대인들은 용감하게 로마군인들과 싸웠다. 이러한 전쟁 가운데 무자비하게 목숨을 잃은
시민들도 또한 많았다. 예루살렘 지역에 사는 많은 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브(Av)달 9 일에 헤롯성전이 불에 타 무너졌다. 아브 9 일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날이기도 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우연한일이기도 하다. 유대인
로마전쟁은 또 한번 유대인들의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이들에게 또 한번의 성전파괴라는
현실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 한번 예루살렘은 페허가 되버리고 말았다.
비록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도 세 군데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헤로디움(Herodium)도 얼마 못가서 무너지고 마케루스(Machaerus)도 로마군인들에게
몰락되었으며, 이제 남은곳은 맛사다였다.
맛사다는 도시가 아니라 헤롯대왕이 건설한 산성이었다. 맛사다는 높이가
1300 핏트가 되며 유대 사막지대와 사해바다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맛사다에는
셀롯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셀롯파의 지도자는 므나헴(Menahem)이였으며 그는
셀롯파를 설립한 갈릴리안의 유다의 아들이였다.
므나헴이 예루살렘 전쟁에서 목숨을 잃자 그의 조카인 엘이아사 벤 야이어(Eleazar
ben Jair)가 주도권을 가지고 맛사다를 지켰다. 사실은 셀롯파들은 로마국에대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들의 숫자는 소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볼때에 셀롯의
독립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셀롯파를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주후
74 년경에 로마장군 플라비우스 실바로 말미암아 맛사다는 로마인에게 넘어갔다.
로마군인이 맛사다에 올라왔을때 셀롯파들은 다 죽어있었다.
로마인들이 맛사다에 올라가서 본 것은 무엇인가? 로마군인이 올라 왔을때 그당시
약 960 명의 셀롯파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자, 여자, 아이들로 구성 되어있었다. 이들은
로마인에게 항복을 하기보다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목숨을 끊은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자살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군인들의 포로들에 대한 잔인한 행위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 로마군인들은 포로를 그자리에서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 그리고 노예로 팔린자들은 거의 콜로시움에서 칼싸움을 하는 자로 죽는다.
또는 사자들의 밥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면에서 셀롯파들은 자신들이 직접
목숨을 끊는것을 택했다.
이러한 유대인로마전쟁에 대해서 기록을한자는 유대인인 요세푸스(Josephus,
주후 37-100)였다. 그는 유대사를 쓴 자였다. 그는 하시모니안 왕가의 제사장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나중에는 바리새인파들과 연관을 맺었다. 그도 역시 유대인들의 반란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포로로 잡혀간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와서 자유의
몸을 되찾았으며 또한 로마인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로마제국에서 인정을 받는 지위 있는 자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위치에서 유대교의 역사및 전통에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특히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잘 해석 해놓기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두번째 성전의 파괴이들의 디아스포라의 삶의
시작이기도하다. `디아스포라’의 의미는 `예루살렘밖에 사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주후
70 년경을 디아스포라의 시초로 보고있다. 역사적으로 디아스포라의 기간은
2 천년동안으로 보고있다. 이스라엘나라가 재건된 1948 년을 디아스포라의 끝으로
보고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지방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은 유대지방에서 다시 삶을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디아스포라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앗수르왕때 포로로 잡혀간
무리들도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이제 유대인들은 유대지역을 비롯해서 로마제국,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와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성전의 존재성은 이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성전파괴로 말미암아 이제 유대인들은 이들이 있는 곳에서 신앙의
중점을 찾아야만 하였다. 디아스포라중에서도 많은 자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각주 Endnote s
1유대인의 헬라화(Hellenism)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상업과
무역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에 있어서 헬라의 정신과 종교를 받아드리는 것에 있어서
갈등이 있었다. 완전히 헬라화 되는 상류층은 전통적인 유대교에서 벗어났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이 구릅에
속했다. 바리세인들과 실롯당들은 완전히 헬라문화에 동화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헬라화는
필연적이었다.이미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나라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다. 헬라어, 아람어, 히브리어등이 었다.
Henry Jackson Flanders Jr., People of the Covenant: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Fourth e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 467.;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 ed. R. J. Zwi
and Geoffrey Wigoder Werblowsk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315-6.
2 이 시민전쟁을 마카비전쟁(Maccabean Revolt)으로 불리우고 있다. 주전 175-135 년경을 마카비 시대 또는
하시모니안왕조 시대라고 부른다."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p. 432-3.
3 헬라화 특징 중 하나는 도시국가문명(polis or Greek City-State)였다.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헬라어와 문화를 도입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연무장(gymnasium)을 통해서 군사훈련을 시켰고 그 외에도
교육기관, 경주장, 극장, 음악당, 학원, 정치회장소로 사용되면서 도시국가 문명을 실천했다. 또 이들은
뛰어난 건축가였으며, 조각가, 시인, 음악가, 극작가, 철학자, 토론자들이었다. 이들이 머무는 곳 마다 경제가
번영했고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Paul Johnson, A History of the Jews (San Francisco: HarperPerennial, 1987).
P. 97.
4 레갑(Rechab)은 주전 841 년경에 살았던 자이다. 이의 아들 여호나답(Jehonadab)은 신앙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우상숭배를 반대한자로써 인정을 받았던 자였다. 레갑의 상징은 반문화주의자를 말한다. Flanders Jr.
p. 335.
5 참조. 행 6 장.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에서
출생하여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를 말하며 히브리 사람들은 팔레스틴에서 출햇아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톰슨성경(신약), P. 196.
6 사두개인들의 원조는 주전 200 년경 두번째 성전시대로 올라간다. 이름의 시조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사독’(Zadok)으로 보고 있다. 사독은솔로몬왕정시대때 예루살렘의 대 제사장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매우 부했으며 귀족에 속했다. 신앙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었다. 특히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으며 또한 영혼 불멸을 부인했다. 그리고 율법에 있어서 구전법(Oral Laws)을 부인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강조했다. “Sadducee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Jewish Religion." P. 600.
7 히브리어로 ‘브르쉼’ (Perushim)이며 의미는 ‘분리된자’이다. 이들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주전
200 년경으로 보고 있다. 바리세파들은 하시딤파하고 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들은 구전법과
기록된율법을 동시에 믿는다. 특히 육체의 부활과 영혼 불멸을 믿는다. 그리고 자유의 의지(Free Will)을
믿었다. 이들의 신앙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당시에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또한 애국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특히 시민전쟁때(마카비 전쟁)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다.
Ibid.pp. 528-9.
8 유대교에서 가장 높은 기관이었다. 특히 로마시대당시 종교적, 정치적, 입법적, 행정적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름은 헬라어에서 나왔다. Ibid., 606-7.
9 프톨로미(Ptolemy, 301-198?)는 처음에 팔레스틴을 소유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왕조를 이어났다. 이
왕조때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이동시켰다. 그 관계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왕조시대때 유대교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었다. 이것은 칠십인 번역(Septuagint)를
편집한것이다. Everett Ferguson, Background of Early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7). pp. 320-1.
10 셀루쿠스왕조는 주전 198-167 년경으로 보고있다. 왕조의 나타남과 마카비안전쟁과는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마카비전쟁때 세루쿠스와들은 다음과 같다: Antiochus III (223-187); Seleucus IV Philopator (187-175);
Antiochus IV Epiphanes (175-164); Antiochus V Eupator (163-2); Demetrius I Soter (162-150); Alexander I Balas
(150-45); Demetrius II Nicator (145-139); Antiochus VI (and Trypho); Antiochus VII Sidetes )138-129). Daniel J.
Harrington, The Maccabean Revolt: Anatomy of a Biblical Revolution (Wilmington, Delaware: Michael Glazier,
1988). Pp. 88-9. 안티오커스 3 세(223-187)는 평화를 가지고 왔고, 그의 아들 셀루쿠스 4 세(187-175)부터는
유대인과 관계가 악화되가기 시작했다. 그의 후계자인 안티오커스 4 세(175-163)는계속해서 공포와 위협을
가져 왔다. Flanders Jr.pp. 468-9.
11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자칭해서 이름을 ‘에피파네’(Epiphanes)라고 불렀다. 에피파네의 의미는 ‘신의
나타남’ (god manifest)이다. Flanders Jr., p. 469.
12 유대교에서 오니아는 순결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있음. 특히 마카비왕조는 오니아를 그들의 조상으로
보고 있음. “Judas (Maccabees) is identified with Onias in this epitome and is presented as the successor of the
Oniad lineage.” The Books of the Maccabees: History, Theology, Ideology, ed. Geza G. Xeravits and Jozsef
Zsengeller (Leiden and Boston: Brill, 2007). P. 17.
13 제이슨은 안티오커스에게 뇌물을 주고 제사장직을 얻었다. 그는 주전 175-72 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다.
참조. 2 마카비 4:8. 안티오커스는 그에게 대제사장직을 허락했다.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ed. Louis
Finkelstein W.D. Davies, vol. I: Introduction; the Persian Period; II: The Hellenistic Age; IV: The Late Roman-
Rabbinic Perio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II., p. 279.
14 그는 대제사장 오니아의 동생으로서 주전 172-163 년경까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이었다. Harrington.
P. 15.
15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Ch . p. 286.
16 이 시대를 유대인 국군의 발생및 국가에 대한 의식을 갖은 때로 봄.이러한 정신은 디아스포라 직전 까지
였다. Doron Mendels, The Rise and Fall of Jewish Nationalism (New York and London: Doubleday Press, 1992). P.
161.
17마카비전쟁 또는 반란의 성경의 자료는 다니엘서, 마카비 1,2 에 나와있음. 마카비전쟁시대는 역사적으로
주전 167-134 년으로 보고 있음. 마카비전쟁에 개입한 자들은 유다, 요나단, 시므온으로 보고 있음. Walter C.
Jr. Kaiser, A History of Israel (Nashville, Tennessee: Broadmand & Holman Publishers, 1998). P. 469.
18 맏타티아는 모딘(Modine)지역(오늘날 예루살렘북서쪽에 위치해잇음)의 출신의 제사장이였으며 그의
가족을 하스모니아(Hasmoneans)가로 부름. 그는 수리아왕명인 헬라신에게 절하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왕의 대사를 죽이고 세벨라지역으로 그의 아들 다섯과 도망하였다. 그곳에서 다른유대인들과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게릴라전쟁이기도 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하스모니’이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시므온’이며 부친은 ‘요한’으로 알려져 있음. 맏타티아에게 다섯아들이 있었다:
요한(John) , 시므온 (Simeon), 유다 (Judah), 엘리에셀 (Eleazar), 요나단 (Jonathan). 역사적으로 맏타티아의
별명이 ‘하스모니’(Hashmonay)이며 그의 손자 유다의 별명이 ‘마카비’ (Maccabeus)이다. Ibid.
19 하스모니안 왕조의 시대는 주전 135-63 년경으로 보고 있음. 하스모니안왕조계열을 계속해 보며는 Simeon
(Simon) (142/1-134) John Hyrcanus I (134-104); Aristobulus I (104-103); Alexander Janneaus (103-76); Salome
Alexandra (76-67); Aristobulus II (67-3); Hyrcanus II (63-40) Ibid.p. 447, 479.
20 참조. 1 마카비 3:1-9:22. 유대역사는 유다를 능력있는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음.
21 참조. 2 마카비 10: 6-8.
22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보며는 항상 대다수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수라 할
지라고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23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P. 313.; 요나단 역시 유다를 뒤를이은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요나단의 장점은 정치였다. 그는 로마와 정치를 통해서 영토와 지역을 넓혀나갔다. 사실상 마카비 전쟁은
유다가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 이제는 정치로서 나라를 다르려야 했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요나단은 필요한
인물이었다. Harrington. Pp. 76-80.
2424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P. 318. 시므온이 대제사장이 될 당시 유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트리폰(Tryphon)은 요나단을 학질로 삼고 유대를 정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인 엘리에셀, 요한,
유다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 당시두개의 파가 있었으며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있었다. 긍극적으로
왕의 인준으로 말미암아 시므온이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떄는 주전 140 년 9 월이었다.; Harrington. P.
80.
2525 암살자는 그의 사위였던 프톨로미였다. 프톨로미는 시므온과 그의 두 아들 유다와 맏타티아를 여리고에
있는 독성(Castle of Dok)에서 살인했다(주전 134 년경).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p. 320.
26 참조. 1 마카비 13:53. 마카비 1 권이 힐카누스 일세 때 기록되었음. Mendels. P. 35.
27 아리스토불르스의 모친은 알렉산드라(Alexandra)였음. 그녀는 헤롯왕에게 그의 아들이 대제사장직을
맡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헤롯은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며느라인
미리암(Miriam)을 제사장으로 삼았다. Ibid., P. 283.
28 알렉산더가 왕계를 계승할때는 주전 103-76 년경이다. 그는 유대왕 처음으로 동전을 만든 왕이다. Ibid. P.
62.
29 안티파타는 그 당시 이두메아의 총독이었다. 그리고 헤롯대왕의 부친이었다.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p. 347.
30 안티파타의 출신은 남유대지방인 에두메아(Edumaea)이었다. 그가 유대교로 개종한것은 유대역사에 큰
영향을 가져다 주었음. 안티파타는 나중에 독약암살로 죽고 그의 그 아들 브사헬과 헤롯이 예루살렘과
갈릴리지방에 통독으로 다스린다. Cecil Roth, A History of the Jews: From the Earliest Times through the Six
Day War (1971). Pp. 93-94.
31 헤롯은 반 유대의 피가 섞여진 에두메인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신임을 얻고 이스라엘에 속국왕이 됨.
David M. Rhoads, Israel in Revolution 6-74 C.E. (Philadelphia, Pennsylvania: Fortress Press, 1976). P. 23.
32 참조. 마 2:3.
33 B. K. Rattey, A Short History of the Hebrews from the Patriarchs to Herod Ther Great, ed. Rev. by P. M. Biny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P. 130.
34 헤롯의 정치수단이 잘 나타난다. 그는 마크 안토니의 위해서 왕이 되나 인준은 안토니의 원수인 시저
아우구스도스(Caesar Augustus)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Mark Allan Powell, Introducing the New Testament: A
Historical, Literary, and Theological Surve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P. 27.
35 헤롯은 유능한 정치가로서 절때로 능력있는 제사장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디아스포라중에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이로말미암아 제사장직은 이제 정치권아래로 머물게 되었다. Mendels. P. 285.
36 헤롯은 자신이 유대의왕과 유다의 왕이 되기를 바랬다. Ibid. PP. 284-5. 그에게는 어떻한 경쟁자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유대왕)의 탄생은 그에게 있어서 위협이 되었다. 참조. 마 2:4. 헤롯은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것인가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물음은 그의 직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37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호의정책을 사용하였다.
38 헤롯왕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중요함을
안 헤롯은 많은 투자을 했다. Mendels. P. 285.
39 참고문헌 34 번을 보라.
40 전설에 그는 그의 아내의 혼에 일생을 시달렸다고 한다. Powell. P. 27.
41 Ibid.
42 아케라우스는 헤롯이 백성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낮추어 달라는 요구를 무시했으며 이로인해 생긴 반란을
군대를 풀어서 진압했다. 3000 명의 백성을 목슴을 잃었다. 이후로 계속해서 시민반란들이 일어났음.
Rhoads.pp. 25-6.
43 안티파스의 통치기간은 주후 4-39 년경이다. 그는 갈릴리지방과 브레아지방을 통치하였다. Powell.p. 28.
44 막 6:14-29.
45 전설에는 그가 불란서로 망명갔다고 말한다. “Antipas, Herod”, "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cMillan, 1993). III, pp. 75-6.
46 아그리파는 주후 37-41 년경 갈릴리지역을 다스렸으며 주후 41-44 년에는 팔레스틴온지역의 분봉왕으로
있었다. 그는 사도행전 25:13-26:32 절에도 나오는 왕이다.
47 그가 주관한 지역은 유대북쪽땅이 었으며 살고 있던 민족은 다민족이었다. 그는 헤롯왕조의 마지막
남자의 후계자이다. Roth. pp. 99-100, 112.
48 사독의 후손들인 사두개인(Sadducees)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였으며 또한 귀족의 제사장을 의미함. E. P.
Sanders, Judaism: Practice & Belief 63 Bce-66 Ce (London: SCM Press, 1992).
49 Roth. P. 112.
50 바리세인의 유대사에서 처음 언급은 마카비반란때 나오는 요나단(주전 161-143)시대에 나온다.Sanders. p.
381.
51 참조. 마 23:23-24.
52 Powell. P. 19.
53 Ibid. p. 20.
54 Ibid.
55 세례요한이 한때는 엣센스파에 속했었다. 그러나 엣센스파는 신약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Ibid.
56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역사적인 인물로 보나 메시야로는 아직도 믿지 않는다. 물론
57 예수님의 탄생과 돌아가심에 대한 년대는 많은 견해가 있음. 보편적으로 주전 4/5 에서 주후 30 년으로
보고있음.
58 예수님의 12 사도들 모두 유대인들었다. P. 318.
59 참조. 행 22:3.
60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알려져있다.
61 Mendels. P. 294.
62 힐렐은 바리세파의 지도자로 있었으며 샤매는 바리세파법정을 지도하고 있었음. The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II, p. 272.
63 Ibid. pp. 245-54.
64 그는 주후 26-36 년경 유대지역을 총괄하였다. 그는 가이사를 섬기는 총독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증오했으며 또한 유대교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Powell. P. 28.
65 이 반란의 시기는 주후 66 년경이며 일어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닌 가사리야(Caesarea)였다. Johnson., p.
136-7.
66 베스파시안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 주후 69 년경 로마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 디도가 그의 직분과 요지를
어어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의 때는 주후 70 년이다. Ibid. p.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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