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에스더와 부림절- 약자의 승리
Esther and Purim: Triumph of the Weak
주전 538 년경, 바벨론제국은 페르샤(Persia)왕1 고레스(Cyrus)의 의해서
멸망했다.2 이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향인 유대땅으로 돌아가도록 조서를 써 붙였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3 그러나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두 번째 고향인 바벨론땅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바벨론제국에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변화가 오고 있었다. 이것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위기인 것이었다.
부림절(Purim)은 바사제국에 사는 유대인들의 생존을 기념하는 날이다.4 이
생존의 기념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적으로 부터 몰살당하려고 했을때에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5 특히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에스더(Esther)이다.6 더욱
흥미스러운 것은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7 그러나 이야기의 전부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어지고 있으며
긍극적으로 에스더서의 결론은 유대백성의 구원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는 것이다.8
에스더의 이름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감추어졌다”는 데서 시작한다. 여기서
감추어졌다는 뜻은 하나님의 이름은 감추어져 있지만 역사와 인도하심은 명백히
나타나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에스더의 바사나라의 이름의 뜻은 “이스타" 또는
“아스탈테”라 하여 그 나라의 신의 이름을 딴 것이다.9
유대교의 역사중에서 부림절(Festival of Purim)은 매우 기쁜날로 정해져있다.
이날에는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특히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날로 정해져있다.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서는 유대교에서 부르기를 매길라(Megillat Esther)또는
두루마리 에스더(The Scroll of Esther)라고도 부른다.10 두루마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당시에 서신을 기록할때면 가죽또는 파피러스의 종이에 쓴 다음에 편지를 말아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다.11
이 의미에서 에스더서는 모르드개와 에스더사이에 오고 간 편지라는 의미도 있다.
에스더 서는 2000 년 유대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12
성경에서 에스더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13
주전경 529 년, 바사의 왕 고레스의 죽음으로 후계자로서 크레스크세스(Xerxes I)일세는
부친의 바사제국을 이어받았다. 에스더서에서는 그를 아하수에로(Ahasuerus)로
알려져있다. 아하수에로는 크레스크세스를 히브리 말로 번역한것이다.
아하수에로는 전쟁을 통해서 그의 영토를 늘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명성 또한
높아갔다. 그는 그의 위엄과 명성을 자랑하기 위해서 큰 잔치를 국내적으로 베풀었다.
그는 장수와 귀족과 방백과 신복을 위해서 6 개월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6
개월이 끝날 무렵 그는 도성 수사에 있는 백성을 위해서 7 일 간 잔치를 또 베풀었다.14
잔치를 베푸는 동안 술에 취한 아하수에로는 그의 왕후 와스디(Vashti)를 왕앞에
나오게 하였으나 왕후 와스디는 불순종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왕은 공식 석상에서 왕후가
모욕을 했다고 생각하고는 마음이 많이 상했다.15 전설에서는 와스디는 네부갓네살의
손녀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녀에게서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바사왕이
바벨론을 정복하였을때 벨사살왕족의 마지막으로 생존해 남은 공주로 알려져있다.16
와스디의 불순종의 내막은 모르겠으나 왕에 대한 모욕은 치명적이었다. 왕은
왕후를 내려 앉게 하고 왕의 모사와 방백들의 조언대로 새로이 왕후를 맞이 할것을
결정했다.17 왕은 전국에 선포해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왕후로 맞이 할것을
알렸다. 바사 전국에 알려진 이 조서는 에스더에 까지 전해졌다. 에스더는 이제 왕의
내시의 인도를 받으며 왕에게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18
에스더에게는 삼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모르드개(Mordecai)였다.19 그는
부모가 없었던 에스더를 직접 딸과 같이 양육하였다. 모르드개는 날마다 후궁 뜰 앞에서
왕래하면서 에스더의 안부를 알려고 했다20. 성경에서는 에스더의 용모는 곱고 아리따운
처녀였으며 또한 겸손했다고 기록하고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마친 에스더는 왕에게
나타나 그의 왕후가 되었다. 왕은 에스더를 왕후 삼은 후에 에스더를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21 그러나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명으로 자신이 유대인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22
이렇게 오만한 와스디를 대신하여 낮고 천한 포로였던 에스더가 영광에 자리에 앉게
된것이다. 에스더는 신앙과 순종으로 더불어 왕에게 뽑히게 된 것이다.
아하수에로왕에게는 하만(Haman)이라는 장관이 있었다.23 그는 왕에게 인정을
받은 자로서 유대인을 미워하던 자였다.24 모르드개는 대궐앞에서 성에 드나드는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하였다. 하루는 왕의 내시였던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짜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을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알렸다. 그러자 에스더는 이
사실을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렸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두 사람을 나무의 긴 장대
위에 달아버렸다.25 그리고 이 암살사건을 기록만 해두었으며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26
몇년이 지난후 아하수에로는 하만을 국무총리로 승진시켰다.27 이제 하만은 왕
다음으로 가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대궐문안팎에 있는 자들은 다 그에게
절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도 하지않았다. 이에 원한을
품은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일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란
사실을 알고나서는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인 모두를 살해할 마음까지 가졌다.28
하만은 바사제국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전멸할 조서를 만들었다.
하만은 이 날을 정하기 위해서 연구를 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미신의 풍습대로
제비를 뽑아 길일을 정하였다.29 아하수에로왕 12 년 정월(니산)에 무리가 하만앞에서
제비를 뽑은 날인 12 월(아달월) 13 일을 택했다.
그리고 나서 하만은 왕에게 나아가 그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왕의 승락을 받았다.
왕은 그가 끼었던 반지을 빼어서 유다인의 적인 하만에게 주며 그의 소견대로 행할것을
허락하였다. 30
이제 하만은 모든것들이 그의 뜻대로 되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천하를 얻은 것
같았다. 그 뿐만 아니라 왕후 에스더가 그를 잔치에 초대를 하였던것이다. 31
이제 바사땅 전국에 조서의 초본을 부쳐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였다. 12 월 13 일 날에
바사에 사는 유대인 모두를 학살하라는 명이었다.32 이 소식은 모든 도성에 사는 민족들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아하수에로왕은 이 명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명을 통해서 온 유대인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모르드개 역시 대성통곡을
하였다.33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렸다. 이 사실을 안 에스더는 이제 왕에게
간구하는 길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왕후가 나라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왕이 에스더를 부른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에스더는 주춤하였다.
에스더는 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와스디도 처벌한 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모르드개는 주춤한 에스더에게 그녀가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녀도 같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일 때문에 그녀가 왕후가 된것이라는 것을 상기
시켜주었다34. 그리고나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요청을 하였다. 요청의 내용은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그녀를 위해서 금식하고 밤낮 3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것이었다.35
이제 시간을 더이상 끌 수 는 없었다. 제 삼일후에 그녀는 결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신앙의 각오를 가지고 왕앞에 나아가 그의 금홀의 끝을 만지며 왕에게 모든
사실을 고했다.36
이제 하만은 자신의 모든 뜻이 이루어짐을 보면서 매우 흐뭇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내와 친구들의 말을 들어 길이가 50 규빗이나 되는 교수대를 만들었다.37
그리고 거기에다가 모르드개를 달려고 했다. 이제 에스더의 잔치초청을 받은 하만은
왕궁으로 달려갔다.
첫번째 잔치날에는 에스더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왕후의 소청을
물었으나 에스더는 두 번째 잔치때에 말할것을 이야기했다.38
두번째 잔치날 밤에 왕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왕록을 읽도록하였다.
거기에 모르드개의 사건의 이야기가 나왔다. 왕은 그의 신하들에게 모르드개에게 어떠한
상을 베풀었는지 물었다. 그의 신하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고했다. 왕은 이제
모르드개를 존귀케하기로 작정했다.39 그리고 나서는 하만을 불렀다. 하만에게 왕을
살린자를 어떻게 해야할것을 물었다. 하만은 자신을 두고하는 말인줄 알고 귀한 선물과
왕복을 입히고 왕이 타는 말을 타고 왕의 방백중 한사람이 말을 끌고 성을 돌게하였다.
왕은 즉시로 모르드개를 그렇게 하도록 명했다.40
전혀 상상 밖의 일이 벌어지자 하만은 집으로 도망갔다.41 그리고 자기가 당한
모든일을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운명이 바뀌어졌다고 말하고 그의
멸망을 말해주었다.42
왕은 이제 에스더에게 그녀의 소청이 무었이냐고 물었을때에 에스더는 하만의
악행을 고해 바쳤다. 왕은 심히 노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만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하만은 이제 에스더에게 그의 살길을 빌었다. 왕은 하만이 에스더에게 간구하는
것을 보고 왕후를 강간함으로 보고 그를 처형할것을 명했다.43 왕의 신하들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위해서 교수대를 만든것을 고했다. 그말을 들은 왕은 하만을 거기에다
매달을것을 명했다.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달린 하만을 보고 나서는 왕의 노가
그쳤다.44
왕은 모르드개를 하만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그리고 모르드개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45 그리고 하만이 만든 조서를 취소하기위해서 에스더는 왕에게 간구하였으며
왕은 왕의 이름으로 유대인에게 뜻대로 글을 써 왕의 반지로 인치라고 하였다.46 이제
두번째 조서는 첫번째 조서를 무효화하였다. 47
두번째 조서에는 유대인들이 원수를 갚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을 대적한 원수들은 몰살하였으며 유대인에대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승리를 했다.48
이렇게 됨으로 유대인들의 역사는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었다. 각 성읍에 사는
유대인들은 즐기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날을 축제일로 정했다. 그리고 그날의 이름을
부림절(Festival of Purim)이라고 불렀다.49
2500 년 역사로 내려오는 부림절은 오늘날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지킨다.
부림절은 회중의 모임으로도 모인다. 유대인들은 사실 부림절은 하루전 날부터 지킨다.
하루전날에는 에스더의 금식(Fast of Esther)을 가진다. 이 날은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유대백성들에게 3 일 동안 금식할것을 간청한것을 기념하기위해서 생긴 유례이다. 이
금식은 그날 새벽부터 해지는 날까지 이루어진다. 이것의 의미는 유대인들이 적들과
싸움의 날을 기념하기 때문이었다.
부림절때 회당에서는 에스더서를 읽고 또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이상한 소리를 내서 그의 이름이 안들리도록 하기도 한다. 부림절의 핵심은
유대민족의 구속과 거기에 따르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그 날에는 맛있는 음식도 많이
준비해 서로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움을 나누기도 한다.
부림절에 또 하나 행하는 전례는 의와 정의를 행하는 일이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챠덱카 부림(Tzedakah Purim)이라고 부른다. 챠덱은 히브리어로 “정의”
또는 “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림절에는 특히 가난한 자들 또는 억압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는 전례가 있다. 그래서 선물을 나누어주며 선을 행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선물을 친구들 또는 가족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이 전례의 시작은
모르드개에서 부터 온다고 전해진다. 모르드개가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요청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풍습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한다.
부림절에의 또 하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 대한 반유대감정(Anti-semitism)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항상 미움과 오해를 받아왔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범해지고 있다. 이들이 살고있는 어느곳에서든지 이러한 위험성은
따라다닌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민감한 상태에서 살고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부림절의 기념은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위험속에서도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것이다.50
부림절이 주는 것은 생존의 희망이다. 그리고 모르드개가 하만의 계획을
알아챘을 때 그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서 적을 물리친 정신을
후세들에게 지금도 전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이 험한 역사가운데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부림절이 주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각주
Endnotes
9. 부림절-약자의 승리
Purim: Triumph of the Weak
1 페르샤는 현재 중동지방에 있는 나라이다. 성경에는 바사(개역판, 1991) 또는 페르시아(현대인의
성경,1973)으로 기록되어있다. 에스더서가 쓰여진 지역은 수사(Susa)임.
2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 통치 B.C. 556-539)였으며 그는 구로스(Cyrus,통치 B.C. 559-
530) 왕을 두려워 하였으며 바벨론제국은 어무런 힘이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때는 주전 539 년경이다.
Henry Jackson Flanders, People of the Covenant: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Fourth e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 430.
3에스라 1:2-4.
4부림절은 ‘제비뽑는다’ (lot) 의미에서 히브리어 단수인 ‘ 불’(pur)에서 나온 절이다. Eugene Merrill, Kingdom
Priests: A History of Old Testament Israel, Seco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 P. 514.
5 참조. 에스더서.
6 에스더의 원명은 아닷사(에 2:7)이며 페르샤제국왕 아하수에로 (Ahasuerus, or Xerxes, 486-465)의 왕후가
된후에 에스더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 참조. “Esther”, "Encyclopaedia Judaica," (New York: McMillan,
1993).p. 906.
7 A first feast that never assumed a central character is the feast called in Hebrew Purim.”J. Alberto Soggins, Israel
in the Biblical Period, ed. Trans. John Bowden (Edinburgh and New York: T & T Clark, 2001). p. 129.
8 하나님의 성호가 등장하지 않아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지만 성호의 빠짐이 오히려 영적의 가르침을 주기
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본다. Flanders.P. 477.
9 The Anchor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and London: Doubleday, 1992). II. P. 633
10 Soggins. P. 130. “Esther, Book of”,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I., p. 633.
11 두루마리에 쓴 말씀은 온전히 손으로 쓰여 졌다. 그리고 일년에 두번 에스더서를 봉독한다. Marc-Alain
Ouaknin, Symbols of Judaism (New York: Assouline Publishing, 2003). p. 82.
12 부림절은 오늘날 아달달(Adar, 2 월 또는 3 월) 14/15 일에 지켜진다. J. Alberto Soggin, Israel in the Biblical
Period, ed. Trans. John Bowden (Edinburgh and New York: T & T Clark, 2001). P. 130.
13 참조. 에스더서.
14 에 1:1-5.
15 에 1:12.
16 와스디의 페르샤의 의미는 “아름답다”(beauty)임. 그녀의 혈통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는 분명치 않다.
“Vashti”, "Encyclopaedia Judaica."XVI, p. 72.
17 에 2:1-4.
18 에 2:9.
19성경에는 모르드개의 이름을 가진 자가 있음. 첫 인물은 바벨론 포로귀환을 한 12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스 2:2; 느 7:7). 둘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인물이다. 모르드개는 베냐민지파의 기스(Kish)의
증손으로서 사울왕의 후손이었다. 기스족은 귀족이었다. “Mordecai”, "Encyclopaedia Judaica." XII, p. 307.
20 에 2:11.
21 에 2:18.
22 에 2:10.
23 에스더사본(Scroll of Esther)에 보며는 하만(Haman)은 아말렉후손인 아각(Agag)으로서 아하수에로 왕의
최고 장관이었음. 그는 모르드개가 절을 하지 않음으로 제국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자이다. 역설적인 것은 사울왕이 그의 조상 아각을 살려주었다는 사실이다 (삼상 15 장). 그러나 하만은
은인의 백성을 학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Haman”, "Encyclopaedia Judaica." VII, p. 1222-3.
24 Flanders. P. 476.
25 에 2:21-23.
26 에 6:1-3.
27 에 3:1.
28 에 3:6
29 제비 뽑는 일을 ‘불’이라고 부름. 참조. 에스더 3:7; 9:24.
30 에 3:10.
31 에 5:1-8.
32 에 3:13.
33 에 3:15.
34 에 4:13-14.
35 에 4:15-16.
36 에 7:1-6
37 에 5:14.
38 에 7:1.
39 에 6:1-6.
40 에 6:7-9.
41에 6:12.
42에 6:13.
43 에 7:8. 현대인 번역에는, “저놈이 궁 중에서 나와 함께 있는 황후까지 강간하려드는 구나!
라고 기록되어 있다.
44에 7:10.
45 에 10:2. 모르드개는 페르샤제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46에 8:11.
47에 8:1-17.
48에 9:1-10.
49에 9:29-32.
50 George Robinson, Essential Judaism: A Complete Guide to Beliefs, Customs, and Rituals (New York: Pocket
Books, 2000). P. 117-8.
참고문헌 Bibliography
The Anchor Bible Dictionary. Edited by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and London:
Doubleday, 1992.
"Encyclopaedia Judaica." I-XVI. New York: McMillan, 1993.
Flanders, Henry Jackson. People of the Covenant: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Fourth
e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Merrill, Eugene. Kingdom Priests: A History of Old Testament Israel. Seco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
Ouaknin, Marc-Alain. Symbols of Judaism. New York: Assouline Publishing, 2003.
Robinson, George. Essential Judaism: A Complete Guide to Beliefs, Customs, and Rituals. New
York: Pocket Books, 2000.
Soggin, J. Alberto. Israel in the Biblical Period, Edited by Trans. John Bowden. Edinburgh and
New York: T & T Clark, 2001.
Soggins, J. Alberto. Israel in the Biblical Period, Edited by Trans. John Bowden. Edinburgh and
New York: T & T Clark, 2001.
이제 구체적으로 남 유다왕국의 함락과 바벨론포로(Babylonian captivity)생활에
대해서 성경에 근거하면서 이야기 한다.
북왕국이 앗수르제국에 의해서 함락되었을 당시 유대의 왕 이름은
히스기야(Hezekiah)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의로운 왕이었다.1 그는 그의 부친
아하스(Ahaz)왕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한 사실을 알고 여호와의 성전을 다시
열고나서 우상의 제단들을 허물고 또한 성전을 수리하였다.2 히스기야는 모세의
율법준수를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신앙생활에 힘을 썼다.3 그리고 어려울때에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그는
앞날을 내다 볼줄 아는 현명한 왕이었다. 그리고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함락할때에
예루살렘을 지킨 왕으로 알려져있다. 그가 왕위에 즉위한 후 예루살렘시에 벽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지하수도를 성내의 실로암(Siloam tunnel)으로 끌어드리는
작업을 실시하였다.4
지하수도의 공사 배경은 이러하다. 그 당시 유다왕국은 산헤립(Sennacherib)의
침입으로 포위를 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의 유일한 물의 근원인 동쪽 성밖에
있는 기혼샘(Gihon Spring)5의 물줄기를 암반을 뚫어 길이 약 600 m의 지하 수도를 성내의
실로암에 끌어들여 예루살렘의 성안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을 공급하였다. 이 지하수도를
또는 히스기아 터널(Hezekiah tunnel)이라고도 부른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예루살렘성전을 정복할 계획을 가지고 와서 성의 둘레를 막기
위해서 벽으로 담장을 쌓기 시작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웅장한 군사력의 위협에서
유다백성들은 소망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하고있다.6 이유는 이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간절히 간구한 기도의 응답이기도
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교만한 산헤립을 치시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영에서 모든 용사들과 장관을 치게하셨다. 그 때에 죽은 앗수르군인들이
18 만 5 천명이었다.7 치욕을 당한 산헤립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에 그는 그의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그의 두 아들들에게 살해당했다.8 히스기야의 간구와
겸손은 그만 구원한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나라까지 앗수르왕의 손에서 건져내게
하였다.
히스기야가 죽은 후에도 유다왕국은 계속 독립 국가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왕국의 독립도 오래가지 못했다. 히스기야의 후계들은 그들의 부친처럼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다시 우상숭배와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후계자들의 치리는 매우
미약했다. 그리고 가혹한 정치를 하였다. 유다왕 므낫세(Manasseh)는 그의 할아버지인
이사야선지자를 죽였다. 이제 유다의 미래는 결정이 나있었다.9
바벨론제국은 무섭게 발전해갔다.10 바벨론민족의 조상은 셈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또 갈대아(Chaldeans)인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의 남쪽에서 나온
자 들이었다. 이들의 역사를 보며는 아술바니발왕(Assurbanipal, B.C. 668-627)11이
죽은후에 그의 왕계를 나보볼라살이 차지했다.12 그리고 나보볼라살(Nabopolassar, B.C.
626-605)은 갈대아제국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이 제국이 후에 바벨론제국으로
발전하였다.13
바벨론제국이 성장할때에는 앗수르제국(Assyrian Empire)은 쇠하여져 가기 시작한
때이다.14 이러한 대 왕국들의 교차기 흥망성쇠가 교차하는 가운데서 타격을 받은 나라는
유다왕국이였다.
바벨론제국의 계속된 발전을 통해 나보볼라살의 후계인 느부갓네살
2 세(Nebuchadnezzar)가 등장했을때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다 정복하였다. 이 의미는
유다왕국도 바벨론의 침략으로 함락되었다는 의미이다. 바벨론의침략이 있기전에
이집트제국의 침략으로 이미 유다는 포로가 된 상태였다. 느부갓네살은 이집트제국을
무찌른후에 유다왕국을 바벨론의 속국으로 만들었다.15 그리고 여호아김을 속국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난 얼마후 이집트는 다시 바벨론과 전쟁을 하였다. 이집트의 상태가
유리함을 본 여호아김은 이집트쪽을 택하였다.16 그리고 나서 바벨론을 배반하였다.
역사를 통해 볼때에 여호아김은 선택을 잘 못했다.
바벨론의 승리는 여호아김의 앞날을 정해주었다. 배반한 여호아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쇠사슬에 결박한 다음에 그를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그의
아들인 여호아긴(Jehoiachin)을 왕으로 세웠다.17 여호아긴이 유다의 왕으로 계승했지만
이제 유다왕국이 버틸힘은 더 이상 없었다. 나이 8 살이었던 여호아긴은 이제 3 개월
10 일만에 그도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그의 삼촌인 시드기야(Zedekiah)를 세워 유다왕을
삼았다.18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왕이었다. 그의 치리때의 나이는 21 세였다. 그리고
왕이되어 그는 11 년을 유다에서 치리하였다.19 그는 성경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받고있으며 조상의 우상숭배를 본받아 하나님의 전을 더럽혔다. 막강한 바벨론의
군사력에 반역을 한 시드기야는 그의 2 년동안의 반역을 통해 예레미야선지자의 메시지를
무시하였다.20
예레미야선지자의 메시지는 유다백성이 회개하고 바벨론왕에게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다.21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에의해 옥에 갇히게되었으며 시드기야는 끝까지 말씀에 불 순종했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선지자는 그 곳에서 예레미야서 애가를 기록하였다.22 이러한
유다왕국의 마지막 때에 예레미야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였다.23 그리고 이 모든 예언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성취되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주전 587-586년경에 바벨론제국의 의해서 함락되었다.24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민족에 있어서 가장 슬픈것이었다. 주전 586 년경
바벨론군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에있는 자들,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모두를
몰살하고 건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전에 있는 모든 물품을 바벨론으로
가져갔으며 왕궁에 있는 보물을 탈취하였다.25 성전과 궁실을 불사르며 성을 헐며 그
모든것들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또 느부갓네살을 반역한 시드기야를 잡아 그의 앞에서
그의 자식들을 살해하고 나서 그의 두 눈을 뽑고 그를 묶은 다음 바벨론땅으로
잡아갔다.26 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27
유다백성의 바벨론 포로생활은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만들었다.
느브갓네살은 유다의 지식인층과 상류계층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유대교의 전통을
유지하게하였다.
그러나 유다땅에 남아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남아있는 자들
가운데 많은자들은 유다땅에서 조그마한 마을을 구성해 살았으며 또한 다른 유다인들은
사마리아로 또는 국경을 넘어 다른 도시로 이민가기도 하였다. 이것이 유다인들의 흩어진
자들의 삶의 시작이다. 이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도 부른다.28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의 제자들과 지지자들의 도움을 입어서 이집트로 망명갔으며 그는 거기서 노년까지
지내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성실함과 계시를 전했다.
디아스포라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땅이 아닌곳에서 사는 것을
가르친다. 이뜻의 근원은 희랍어에서 나온것이다. 희랍어의 diaspora의 의미는
“흩어짐”이다.
북 왕국의 이스라엘백성과는 다르게 남 유다민족은 포로생활에서도 계속해서
그들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차이였다. 여기에 대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한가지는 바벨론 지역에 유대인들이 거한 곳에는 중심지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벨론에 거한 유대인들을
골라(gola)라고 부르며 또는 베네 골라(bene gola)라고 불렀다. 베네골라의 의미는
“포로생활”의 자녀라는 뜻이다.
바벨론에 거하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백성에 대한 정책은 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자유와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포로들이 바벨론에 왔을때에는 이미 유대인의 집단이
구성되어있었다. 그리고 포로들이 유대에서 가지고 온 종교책들과 물건들은 이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바벨론제국에 유대교의 역사가 가장 깊게
알려져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배울 점이 이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불굴의 의지이다.
이들은 몇 천년이 지나도 이들의 정체성과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곳 마다 회당을 지어 이들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유대교를 유지해나간다.
바벨론에있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있다. 비록 나라와
성전은 사라졌지만 이들에게는 항상 이 질문이 따른다.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은 효과가
있는 가’?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알다시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또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아있는 백성은 회개와
자신을 낮추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디에서든지 체험하였던 것이다.
이제 성전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된 유대인들은 자신 각자의 믿음생활을 해야만
했다. 옛날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을 때에는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와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 에게는 제사장들이 있어서 제사를 드렸는데 이제는 그러한
실정이 아니었다. 바벨론에서는 제사장이 없었을 뿐더러 예배의 중심지였던 성전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성전중심 또는 제사장의 인도를 따르는 것 보다는 유대교의 절기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절기를 지키고 신앙의 의미를 찾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유월절, 부림, 그리고 사죄의 날 같은 절기를 중요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절기를 지킴으로 유대교를 살려나갔다.
이러한 절기를 통한 유대교는 성전중심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이유는 디아스포라
누구든지 어느곳에서든지 절기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상 어떤
성전중심보다는 개인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어느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생활은 바벨론 포로생활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발견이고 또 발전인것이다.
회당의 시작은 예루살렘성전의 파멸에서 부터 시작된다. 이제 성전없이 개인의
신앙대로 모이는 단체가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든지 모였다. 그리고
기도와 예배 또 절기를 함께 지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이기 시작한 곳이 회당의 시초가
되었다.
회당의 목적은 토라공부, 그리고 말로 내려온 전통을 문자화하는 곳이었다.
유대인들에게서 말로 내려온 전통과 이들의 전통은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이 두개의 전통은 전부였다. 에스겔선지자와 에스라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록하고 연구한 자들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율법의 완전한 책은
바벨론포로시대때 유대교 회당에서 집필 됐다고도 믿고있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의
포로생활 150 년후에 에스라(Ezra)가 바벨론에서 율법을 가지고 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낭독했다는 말이 기록되어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이제는 새로운 희망이 주어졌다.
이것은 선지자들에게서 부터 온 것이다. 선지자들의 메시지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포로생활을 할것을 말했으며 또한 포로생활 후에 다시 유대땅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였다. 이러한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선지자였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소망의
메시지는 이들의 어려움을 극복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또 이들로
하여금 바벨론문화 또는 삶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큰 원인이 된것이다.
각주
Endnotes
8. 유다왕국의 패망과 바벨론 포로생활
Fall of Kingdom Judah and Babylonian Captivity
1 Thomas and George Rawlinson Kirk, Studies in the Books of Kings (Minneapolis, Minnesota: Klock & Klocks
Christian Publishers, Inc, 1983). Pp. 179-202
2 참조. 대하 29:3. Eugene Merrill, Kingdom Priests: A History of Old Testament Israel, Seco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 P. 423.
3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마음이 굳어져 있었으며 무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월절을 지키려는 마음 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 중에서는 불결한
자들도 있었다. Ibid. p. 424.
4 Henry Jackson Flanders, People of the Covenant: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Fourth e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p. 360-363.
5 기혼샘은 예루살렘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빗물을 저장해서 음료수로 마셨다. Ibid. p. 361.
6 Merrill. Pp. 436-442.
7 왕하 19: 35.
8 대하 32:21; 왕하 19:37 두 아들의 이름은 아드라멜렉과 사르세.
9 유다왕국의 종말은 히스기아의 아들 므낫세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그의 부친의 행적과 정 반대의
정책을 펼쳤음. 그의 왕위는 주전 686-642 로 보고 있음. Merrill. P. 446.
10 또는 신 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이라고 부름. 제국은 주전 609-529 까지 유대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음. Ibid. p. 460-1.; Bright, p. 410.
11 이 당시에 바벨론 제국의 왕들에 시대에 많은 견해가 있음. Ibid. pp. 450-1.
12 아술바니발왕의 아들은 아술에틸리마니(주전 627-623)이 였다. 그러나 신바벨론제국을 설립한 왕은
느부갓네살로 알려져 있음. Ibid., p. 461.
13 유대왕국 당시 신바벨론 제국의 왕들은 다음과 같다. Nubuchadnessar II 605-562; Evil-Merodach 562-560;
Neriglissar 560-556; Labasi-Marduk 556; Nabonidus 555-539. Ibid., p. 461.
14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3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1). P. 413.
15 Merrill. P. 463.
16 여호아김은 유다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이집트에 걸었으나 그는 잘못 선택한 것이다. Bright.p.
413.
17 왕하 24:10-17.
18 왕하 24: 17. 왕의 삼촌 맛다니야(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Bright. P. 414.
19 왕하 24:18.
20 Merrill., p 465.
21 렘 38: 17.
22 예레미야의 애가는 예루살렘의 함락이후에 기록됬음. Robert B Chisholm, Handbok on the Prophet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p. 216.
23 Ibid.p. 154.
24 Merrill., p. 465.
25 왕하 24:13.
26 왕하 25:7.
27 왕하 25:21.
28 Flanders., p. 515.
참고문헌 Bibliography
Bright, John. A History of Israel. 3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1.
Chisholm, Robert B. Handbok on the Prophet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Flanders, Henry Jackson. People of the Covenant: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Fourth
e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Kirk, Thomas and George Rawlinson. Studies in the Books of Kings. Minneapolis, Minnesota:
Klock & Klocks Christian Publishers, Inc, 1983.
Merrill, Eugene. Kingdom Priests: A History of Old Testament Israel. Seco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