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성서때의 왕들
Kings in Biblical Periods
사울(Saul)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다.1 이스라엘백성들은 사울이 모세가
모세오경에서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보고있다. 모세는 한 시대에 왕이 나올것을
예언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일 시킬것을 보고 있었다.2 사울자신도 처음에는 왕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3 또 그는 그가 왕이 된다는 것 조차도 마음에 걸렸다.4 이유는 그는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가장 미약한 가문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이었다.5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 된것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언급이
분명하지 않다. 사울의 왕이 된것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6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지파가 보는 가운데 라마(Ramah)의 근처인 미스밧(Mizpeh)이란 곳에서
왕으로 선택을 받았다.7
사울은 어떤한 자였는가? 성경에서 사울은 베냐민파 기스(Kish)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는 외형으로 보면 완벽한 자였다. 그의 체구는 휼륭하였으며 키도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컸다. 그리고 얼굴도 매우 잘 생겼다. 그리고 사울은 항상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것은 사울은 백성들에게 군사력의 지도력으로
인정을 받고있었다.8 그는 블레셋사람들과 전쟁을 통해서 유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또한 많은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사울의 약점 또한 그의 성공만큼 뚜렷하였다. 사울은 우선 사교성이 없었다.9 그는
그의 모든 권력을 나누어 줄줄을 모르는 자였다.10 그리고 그의 모든 권력은 전쟁에 촛점을
맞추어 사용하였다. 사울은 왕이 누리는 모든 권한을 누릴줄을 몰랐다.11 반면에 그는
전쟁에 그의 모든 힘을 쏟았다. 외교에 있어서도 그는 그의 족속인 베냐민지파와 유대지파
외에는 화해정책을 잘 해내지 못했다. 그는 열 지파에게서 인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지지도 받지 못하였다.12
그러나 사울에게 있어서 가장 인정을 못 받은 자는 그를 안수한 사무엘이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자였다. 사무엘 역시도 사울에 대해서 많은 불만과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불만은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바로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13 마지막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은 아말렉(Amalekites)군인들과
전쟁이 벌어진 데서 시작한다. 사울은 아말렉인과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아말렉을 칠때에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는
일이었으며,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한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그렇게 어려운것이 아니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아멜렉인들에게서 승리를 주실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사울은
아말렉왕을 살려주고 또 그 땅에 좋은 것들은 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말렉 왕인
아각(Agag)을 살려둔 것은 사울에게 있어서 왕으로 마지막이 된것을 못을 박은 셈이다.14
하나님께 불순종으로 왕권을 놓친 사울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사무엘은 또 다른 왕을 찾아서 움직이여만 하였다. 사울은 그의 왕권이 그의
아들에게로 넘어가기를 바랬지만 이제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새로운 왕을 맞이 해야만
하였다.15 그러나 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울은 그의 왕권을 내놓아야만 하였다.
사울이 살려둔 아말렉의 왕 아각(Agag)은 사무엘이 직접 목을 베었다.16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17 아각을 처형한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슬퍼하면서 그의 거처인 라마(Ramah)로 돌아가고는 두번 다시 사울을 만나지 않았다.
사무엘은 그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않았다. 성경에서는 사무엘은 사울을위해서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8
사무엘은 이제 다시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떠났다.19 베들레헴은
유대땅이었으며 유대지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사무엘은 이새(Jesse)의 가정으로
들어갔다. 사무엘은 이새의 7 아들들을 다 만나 보았다. 6 아들의 체구와 생긴것으로는
부족한것이 없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택한것이 아님을 보고 이새에게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묻는다. 이때에 이새는 그에게 막내 아들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사무엘은
그 막내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이새의 막내이름은 다윗(David)이었다.20
성경에서 사무엘은 다윗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을 하나님이 택한줄을 알았다고
기록하고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21
이제 다윗은 사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백성의 왕이 되는것이었다.22
사무엘의 축복으로 다윗은 그의 아비집을 떠나서 사울왕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사울왕전에서 그의 신하로 인정을 받으며 또한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아가고있었다. 다윗은 몸매가 빠르며 노래부르기를 좋아했으며 용모가 준수하였다.
그리고 그는 매우 용맹스러웠다.23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은 전설처럼 유명하다.24 다윗은 블레셋의 용사인 골리앗을
창과 칼로 무찔른것이 아니라 물매돌로 그를 물리친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한 골리앗을 돌로 무찌른것이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은 이제 사울왕에게서 완전히
인정을 받게되었다. 그리고 다윗을 그의 궁전안에서 수금을 타게하였다. 사울왕은 그에게
정신적질환이 오며는 다윗을 시켜서 수금을 타게하고 다윗의 음악을 들으면 그는 마음이
제대로 다시 돌아오고는 하였다. 성경에는 악신이 사울에게 임할때 다윗의 수금을 통해
왕이 나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울왕은 다윗을 친 아들로 생각하면서 그를 아꼈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Jonathan) 역시 다윗을 사랑하였다. 이것을 본 사울은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요나단은 왕위를 이을 후계자였다.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생각한 사울은 요나단이 다윗을
더 인정하고 사랑함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사울의 생각에는 다윗을 처치하지 않으면
왕권이 다윗에게로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나단은 사울에게 여 동생 미갈(Michal)을 다윗의 아내로 줄것을 요청했다.
사울은 이 기회를 통해서 다윗을 죽일것을 계획했다. 사울은 다윗에게 왕가의 사위가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 조건은 블레셋남자의 양피 100 개를 베어오는
것이었다.25 사울의 동기는 다윗이 블레셋사람들에게 목숨을 잃는 것이었다.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는 것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천한 자이고
가난한자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제 왕의 사위가 되는 길이 열린것이다. 다윗은
이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나가서 블레셋사람의 양피를 숫자에 맞게 사울왕앞에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의 왕가의 사위가 된것이다. 26
사울은 이제 문제가 심각해 졌다. 다윗에 대한 그의 두려움과 걱정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더 심각한것은 이스라엘백성이 다윗을 사랑하는 열기는 갈수록 높아갔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사울의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27 다시 말하면 사울이 죽인 자들은 몇천 명으로 셀 수 있고 다윗이 죽인
자들은 몇만 명으로 셀 수 있었다. 이 여인들의 노래는 사울로 하여금 다윗에게 창을
던지게 만들었다. 급히 창을 피한 다윗은 그 자리에서 도피하였다. 이제 다윗은 방랑자가
되어버렸다. 28그리고 사울은 다윗의 평생의 대적이되었다.
사울을 피한 다윗은 사무엘선지자를 찾아가서 그에게 사울에대한 모든 이야기를 하였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위로의 말과 격려를 해주었다. 다윗은 제사장집에 머무르며
망명생활을 하였다.29
이스라엘의 위험은 이제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데 부터 시작되었다. 블레셋의
전쟁의 위협에도 사울은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윗을 잡으려는 생각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블레셋의 전쟁은 오고야 말았다. 이 전쟁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하고 말았다. 블레셋사람과 전쟁이 벌어진 곳은
길보아산(Mount Gilboa)이였다. 그리고 때는 주전 1005 에서 1004 사이였다. 사울은
블레셋과 싸우면서 그의 모든 아들들을 잃었다.30 그 중에는 요나단도 포함하였다. 사울
역시도 블레셋군인들에게 죽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쪽으로 택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칼을 놓고 그위에 엎드러져 죽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죽었다. 이제는 다윗의 차례가
온것이다.
다윗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성경에서 그는 잘 생겼고 붉으스름하게 생겼다고
기록하고있다. 그는 신앙과 믿음을 가진 자로써31 시를 읊고 또 노래를 즐겨 부르는
자였다. 성경 시편(Psalms)에 많은 시들은 그가 기록한것으로 알려져있다.32
또 다윗은 훌륭한 군사였다. 그는 군사전력에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품과 실력은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안전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통일하는데 유리하였다.
사울왕이 죽을 때에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 유대와 베냐민 지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당시 열지파는 이스보셋(Ishbaal)이 주관하고 있었다.33 그리고 이스보셋이 죽은 다음에
다윗이 10 지파도 주관하게 되었다.34
역사는 다윗을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다윗이 왕이된 때는 그에게 많은 외부의 적이
없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하락하는 때였으며 다윗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의 모든 정력을 국내안의 화평과 블레셋에게만 쏟았다. 다윗과 블레셋들과의
싸움은 전설적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승전을 가져왔고 그는 이스라엘지파를 이제 나라로
이끄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제 왕으로써 한 나라를 집권하게 되었다.
다윗은 전쟁뿐만 아니라 군사적 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그는 행정을 통해
통치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신앙및 종교적으로도 힘을 많이 썼으며 나라의 필요한 부분을
잘 알아서 지혜롭게 치리하였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최대한도로 활용한
왕이었다.35
다윗의 가장 큰 활약은 예루살렘(Jerusalem)을 정복한 일이다.36 그리고 이 곳을
그의 나라 수도(capital)로 세웠다.37 그리고 처음으로 언약궤(Ark of Covenant)를
가져오기도 하였다.38 궤를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루살렘은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중심 도시가 되었다.39 예루살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준 영향은 몇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이스라엘백성의 포로생활 시작부터 예루살렘의 영향이 감소되었다.
다윗은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또 언약궤를
위해서 성전(Temple)을 짓기를 갈구하였다.40 그래서 그는 성전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재료와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짓는 일을
그의 아들 솔로몬(Solomon)에게 넘겨줄것을 알리셨다. 이유는 다윗은 군인으로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41 그리고 다윗이 그 당시에 언약궤를 위해서 성전을
짓는 일은 정치적으로 위험하였다. 이유는 남이스라엘과 북이스라엘 사이에 성전의
위치에 대해 일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의 모양도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다윗은 사명은 이스라엘의 남과 북을 통일
시키고 또한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사명을 거의 마치어 가고 있었다.42
다윗과 밧세바(Bathsheba)의 사건은 더무나 잘 알려져있다.43 훌륭한 대왕 다윗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군사의 찬란한 승리와 업적으로 그의 이름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를 따라갈만한 대적이나 도전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허물이
있었다. 그 허물은 자신에게서 발견되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다윗의 제한된
인간의 허물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왕들이 전쟁을 하러 나가는 봄철에 다윗은 그들의 부하들과 전쟁을 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의 궁전에 남아서 쉬고있었다. 하루는 그는 궁전 옥상에 올라가 바라보는
도중에 여인이 목욕을 하는것을 보게되었다. 그는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통해 마음을
잃었다. 그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려고 부하를 시켰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요 그녀의 남편은 헷 사람의 우리아(Uriah)였다. 그 당시 우리아는 다윗의 부하로
전쟁중이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정을 통하고 그녀로
하여금 잉태케 했다. 다윗은 그의 죄를 합법화하려고 그의 부하 장군 요압(Joab)에게
기별하여 그 진중에 있는 우리아를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전쟁중에 온 우리아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다윗은 계속해서 우리아에게
아내와 동침 할 것을 강요했으나 우리아는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아내와 함께 해야 할
우리아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잤다. 기회가
보이지 않은 다윗은 요압에게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모두들
뒤로 물러가게 함으로 그로하여금 적의 공격에 죽게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행위는
하나님앞에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일이었다.44
우리아는 싸움에서 전사를 당하고 이 소식을 다윗에게 전달하였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의 부하들을 위로하고 나서 밧세바와 결혼을 하였다.
다윗은 그가 우리아에게 행한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함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그의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나단(Nathan)선지자는 다윗에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았으나 그에게 태어나는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는 매우
약하였고 얼마 가지 않아서 죽었다. 다윗은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했었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자 마자 그는 아이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45
하나님의 자비함으로 밧세바는 두 번째 아이를 낳았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Solomon)이었다.46 그는 후에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후계할 자였다.
다윗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난 때까지 그는 자식들에게 많은 시련을 당했다. 비록
그는 대왕이었고 군사의 천재력을 발휘한 왕이였으나 자식들이 그에게 준 상처는 매우
크다. 우선 그에게는 첫째 아들 암논(Amnon)이 있었으나 그는 그의 장자권을 잃었다.
장자권을 잃은 이유는 그의 배다른 여동생 다말(Tamar)을 강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리압(Chileab)은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 그리고 압살롬(Absalom)은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아도니아 (Adoniah)도 나중에 솔로몬왕에게 죽임을 당했다.47
다윗은 그가 죽을때까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았다.48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운
후계자가 솔로몬이었다. 솔로몬 역시도 그의 어머니 밧세바와 제사장 사독(Zadok)을
통해서만 왕위를 계승받게 되었다.49 다윗은 주전 965 년경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헤브론(Hebron)에서 칠년을 치리하고 예루살렘에서 치리한것은 삼십 삼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그의 나라는 견고하였다.
솔로몬왕은 매우 세속적인 왕이었다.50 그는 그의 지혜와 느끼는 것으로
치리하였다.51 그는 영적인 일보다 세속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무역과
상업을 개선하는데 촛점을 가졌다.52 그는 국제적으로 통용을 일 삼았으며 또한 사울이나
그의 부친 다윗의 모습을 따르지 않았다. 또한 그는 다른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통해서
정치동맹을 맺었으며 우호관계를 이어나갔다. 그에게는 약 700 명의 후비가 있었으며 약
300 명의 첩을 두었다. 이들은 솔로몬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거침돌이 되었다. 또 그는
그의 후비들을 위해서 다른신들의 신당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므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진노하시사 그의 왕국을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의 때에는 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유는
다윗의 언약을 생각해서 였다.
솔로몬의 지혜는 전설적이다. 그는 성경에 잠언서와 전도서 그리고 아가(Song of
Songs)등을 기록한 왕이며 그는 그외에도 3000 이나 되는 시와 글을 쓰기도 하였다.53 그의
글들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것이라고 전도서는 끝낸다.54 그의 부와
영화는 막대했다. 그 왕권시대에는 은(silver)은 귀한금속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병거대와 군마들은 애굽에서 수입해온 귀한 것들이었다.55
솔로몬이 이룬것들중에 가장 중요한 업적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성전건축은 또한 부친 다윗의 긍극적인 소망이었다.
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막대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의 수요가 십팔만명이었으며 이
노동자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와야만 했다. 이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솔로몬은 세금을 부과시켰다.
성전은 솔로몬이 즉위한지 4 년 시브(Ziv)월 이집트를 떠난지 480 년에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7 년 6 개월을 걸쳐 완공했다.56 성전의 길이는 60 규빗 (27m)이며 넓이가
20 규빗(9 m) 그리고 높이가 30 규빗(13.5m). 전의 성소 앞 낭실의 길이는 20 규빗, 넓이가
10 규빗이다. 전은 내벽과 외벽의 2 중벽으로 되고, 외벽이 내벽보다 낮다. 외벽에는 높은
들창이 있었다.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는 지성소(Holy of Holies)였다. 이 곳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지성소의 내측은 길이가 20 규빗이었고, 넓이가 20 규빗이고 길이가
20 규빗이었다. 그리고 온 벽을 정금으로 입혔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지성소 안에 감람목으로 두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룹을 금으로 입혔다.
그룹(Cherub)들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각 그룹의 날개의 길이는 한쪽 날개가
5 규빗이고 다른 날개도 5 규빗으로 합이 10 규빗이었다. 두 그룹의 날개의 총 수는
20 규빗으로서 그룹의 두 날개의 끝들이 양벽에 닿았다. 그룹들의 얼굴은 외소를 향하고
서 있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대제사장이었으며 그는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앞에 기도를 드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해서 간구하였다. 성전
밖에는 번제단(Altar)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 제사장들이 매일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특별한 날에 백성들이 특별예물을 가지고 올 때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이 예물들을
바쳤다.
솔로몬이 죽은 때는 주전 926 에서 922 년경된다.57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Rehoboam)이 대를 이어 왕좌에 앉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으로 세워진 왕국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렀다.58 거기에다 10 지파들의 분열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이스라엘의 10 지파들은 그들의 왕권의 집중이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에서 나온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그리고 긍극적인 분열을 가져온 사건은 여로보암(Jeroboam)의
요청이었다. 여로보암은 그당시 이집트에 망명하고 있었다. 솔로몬이 죽은 것을 알자 그는
르호보암에게 중세와 부역을 가볍게 해주기를 간구했다. 부친을 섬기던 노인 지도자들은
르호보암에게 간구를 받아 줄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그와 함께 자란 젊은친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거절의 보고를 들은 10 지파지도자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59하고 다윗의 가문을 배반하였다. 정치에 지혜가 부족한
르호보암은 왕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르호보암의 대답은 북 이스라엘지파로부터 미움을
샀으며 유다와 르호보암을 배반했다. 이일 후로 남 이스라엘지파와 북 이스라엘
지파에서는 100 년간 전쟁과 분열의 상태였다. 역사적으로 남 왕국을 유다왕국(Kingdom
of Judah)라고 부르며 북쪽 왕국을 이스라엘왕국(Kingdom of Israel)으로 부른다.
르호보암은 유다왕국에서 17 년간 치리하였으며 또한 떨어져 나간 10 지파를
회복하기 위해서 용사 18 만명을 이끌로 전쟁에 나아갈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서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그는 군대를 철수하고 내란을
회피하였다.60
유다왕국의 왕들의 이름과 치리년대는 다음과 같다.
르호보암 (Rehoboam) * 930-913 B.C. (17 년)
아비얌(Abijah, Abijam) 913-910 B.C. (3년)
아사 (Asa) 910-869 B.C. (41년)
여호사밧(Jehoshaphat) 869-848 B.C. (25년) 아사왕과 함께 치리 시대는 872-869 임.
여호람(Jehoram) 848-841 B.C. (8년)
아하시야(Ahaziah) 841 B.C. (1 년)
아달랴(Athaliah) 841-835 B.C. (6년)
요아스(Joash) 835-796 B.C. (40년)
아마샤(Amaziah) 796-767 B.C. (29년)
웃시야(Uzziah) 792-740 B.C. (52년) 아마샤와 함께 치리한 시대는 792-767 임.
요담(Jotham) 750-735 B.C. (16년) 웃시야와 함께 치리한 시대는 750-740 임.
그의치리시대는 750-735 B.C.이며 그가 스무해 되는 시대는 750-732 임.
아하스(Ahaz) 732-715 B.C. (16년)
히스기야(Hezekiah) 715-686 B.C. (29년)
므낫세(Manasseh) 697-642 B.C. (55년) 히스기야왕과 함께 치리한 시대는 697-686.
아몬(Amon) 642-640 B.C. (2년)
요시야(Josiah) 640-609 B.C. (31년)
여호아하스(Jehoahaz) 609 B.C. (3개월)
여호야김 (Jehoiakim) 609-598 B.C. (11년)
여호야긴 (Jehoiachin) 598-597 B.C. (3 개월)
시드기야(Zedekiah) 597-586 B.C. (11년)
예루살렘 멸망이 주전 586 년경이었다.
므낫세 왕권때부터는 북이스라엘왕국은 포로 생활로 들어가면서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남유다 왕국만 단존하였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첫번째 왕은 여로보암 1 세였다. 그리고 그의 치리 수도는
사마리아(Samaria)61로 정했다. 처음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은 왕성해 보였다.62 그리고
북쪽땅에 사는 백성들이 남 유다왕국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많았고 경제와 상업도
북쪽이 우월했다. 63
그리고 여로보암 1 세는 우상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까지 안 올라가도
사마리아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배교의 신앙습관을 도입했다. 그리고 그는 산당을 많이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의 백성을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또 절기의 날짜를 바꾸어
제사를 드렸다.64 이것은 여로보암이 왕으로써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격려한셈이되고
또한 타락케하는 죄를 범하고 만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로보암 1 세가 저지른 신앙의 배교는 이스라엘백성과 왕족에게 큰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65
이러한것들은 북왕국의 원죄였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연쇄반응으로 후대에도
계속 해서 사악한 왕이 나오게 되었으며 파멸의 길을 찾아가고있었다.
북 왕국의 왕들과 그 치리기간은 다음과 같다.
여로보암 (Jeroboam) 930-909 B.C. (22 년)
나답(Nadab) 909-908 B.C. (2 년)
바아사(Baasha) 908-886 B.C. (24 년)
엘라(Elah) 886-885 B.C. (2년)
시므리(Zimri) 885 B.C. (7 일)
오므리(Omri) 885-874 B.C. (12년)
아합(Ahab) 874-853 B.C. (22년)
아하시야(Ahaziah) 853-852 B.C. (2년)
여호람(Jehoram) 852-841 B.C. (12년)
예후(Jehu) 841-814 B.C. (28년)
여호아사스(Jehoahaz) 814-798 B.C. (17 년)
요아스(Joash) 798-782 B.C. (16년)
여로보암 2 세(Jerobo am II) 793-753 B.C. (41년)
요아스와 함께 치리한 시대는 793-782 B.C.
스가랴(Zechariah) 753 B.C. (6 개월)
살룸(Shallum) 752 B.C. (1 개월)
므나헴(Menachem) 752-742 B.C. (10년)
브가히야(Pekahiah) 742-740 B.C. (2년)
베가(Pekah) 752-732 B.C. (20 년) 길리앗에서 치리 시대는 주전 750 년부터이다.
호세아(Hoshea) 732-722 B.C. (9 년)66
사마리아 함락은 722 B.C. 년이었다.67
북이스라엘왕국의 왕들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부족했다. 북
이스라엘백성의 정신적 지도자는 왕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왔다.68
각주
Endnotes
6. 성서때의 왕들
Kings in Biblical Periods
1 사무엘선지자는 늙어지고 그의 아들들은 무능하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열방과같이 그들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함 (삼상 8 장). 하나님은 이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우심.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의 제도를 알게 하심. 하나님은 이들이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려 함이라고 말씀하심. 이러한 상황에서 베냐민의 지파의 사울을 택하심. 참조.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3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1). p. 241.
2 이스라엘이 이제 족장(친척)시대에서 왕조시대로 옮겨가고 있음. 이제는 왕국시대로 접어든다.Rainer
Kessler, The Social History of Ancient Israel: An Introduction, ed. Trans. by Linda M. Maloney (Minneapolis,
MInnesota: Fortress Press, 2008). P. 78.
3 구약에서 사울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자도 많이 없다. 그의 성품과 개성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고 확실치
않다. 오직 분명한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제거하신것이다. Philips V. Long, The Reign and
Rejection of King Saul: A Case for Literary and Theological Coherence, Sbl Dissertation Series 118 (Atlanta, GA:
Scholars Press, 1989). P.
4 참조. 삼상 10:22. 그는 행구 또는 군대의 짐에 숨었음. 이 것을 겸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톰슨 성경 주석,
p. 423).
5 사무엘상 10: 22
6 사울이 왕위에 오른것에 대해서 미스테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그가 왕으로 택함은 성경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음. Long. P. 1-2.
7 참조. 삼상 10:17
8특히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함도 포함됨. Tony W. Cartledge, 1&2 Samuel, ed. R. Scott Nash, Smyth &
Helwys Bible Commentary (Macon, GA: Smyth&Helwys, 2001). P. 149.
9 사울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외모도 준수했고 겸손했으며 전성기에도 도량이 넓어 기꺼이 잘못들을
고백하기도 했으며, 언제나 대담하고 용감했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던 정서 불안이 있었다.
암울한 기분일 때는 지적인 행동를 하지 못하고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마저도 멀리하곤 했다. Bright. P.
246.
10 사울은 카리스마를 가진자였으나 남쪽출신으로 북쪽의 백성을 통합하는 데 결핍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성직자들과 사울의 신임을 잃고 말았다. Paul Johnson, A History of the Jews (San Francisco:
HarperPerennial, 1987). P. 52-3.
11 그에게는 큰 후궁을 가지고 있지고 않았고, 친척외에는 다른 지휘관도 없었으며 호화로운 왕궁도 없었다.
(참조. 삼상 20:25; 22:6). 참조. Bright. P. 245.
12 Johnson.p. 52-3.
13 Long. P. 87.
14 참조. 삼상 15 장 사울에 의해서 살림을 받은 아각의 후손 이었던 하만은 반대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계획한다. 참조. 에스더서.
15 사울은 그의 왕조가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가기를 원했지만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되기를 바랬으며 또한
그는 전쟁에 전사한다. 참조. 삼상 20: 1-11; 31 장.
16 삼상 15:32-3
17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보여 주고 있음. 참조. 삼상 15: 22.
18 삼상 15:35
19 이새는 에브라다 베들레헴에 거했다. 이곳은 다윗의 출생지였음. 참조. 삼상 16:1.
20 다윗은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음. 다윗의 혈통은 다음과 같다. 유다, 베레스, 헤스론, 람, 암미나답, 나손,
살마, 보아스, 오벳, 그리고 이세를 통해서 내려온다. 참조. 역대상 2: 3-15.
21 삼상 16:12-3
22 사울과 다윗으로 부터 왕조가 시작됨.이뜻은 이스라엘에게 지도자가 생겨나면서 구체적인 왕권제도가
들어선다. Kessler. P. 79.
23 다윗의 성격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음. 참조. Steven McKenzie, King David: A Biograph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 185.
24 삼상 17:1-58. 다윗과 골리아의 이야기는 두개의 전통이 합해졌다고 보는 설고 있음. 삼상 17: 31-39 절은
사울이 다윗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55-58 절에서는 사울이 다윗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나온다. 70 인
번역(Septugiant, LXX)에서는 17:1-11. 32-49, 51-54 절 만 기록하고 있음. 나머지 12-31, 50, 55-58 절은 후에
마소레 번역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함. 참조. MeKenzie, pp. 70-71; Cartledge, p. 213.
25 삼상 18: 25
26 삼상 18:20-27. 사울은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했지만 다윗은 200 명 분의 양피를 기간 내에 가져
옴으로 왕녀와 결혼을 하게 됨. 다윗은 무사로서 계속 발전해 나간다.
27 삼상 18:7.
28 다윗은 그의 고향인 유다 광야로 도망하게 된다. 참조. 삼상 22: 1.
29 삼상 19:18
30 삼상 31:6. 사울은 다윗을 내 쫓은 후 종말을 맞이했다. 사울은 다윗을 쫓는 데 혈안이 되어 그 싸움을
지속할 처지가 못되었고, 블레셋은 이미 이긴 싸움에서 승리를거둔다. 사태를 바꾸어 보려는 마음으로
엔돌에서 신접한 여인을 만나 사무엘과 이야기 가운데 사태는 돌이킬 수 가 없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궤멸되고, 사울의 세 아들은 전사했으며 그도 중상을 입고 자결했다. Bright, pp. 249- 250.
31 사람들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중심)을 보심.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그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줌. 참조. 삼상 16:7.
32 Robert Browning’s “Saul “에서 그는 다윗을 매우 친밀한 시인이라고 말함. McKenzie, p. 4.
33 참조. 삼하 2:10. 이스보셋의 재위 기간은 2 년 밖에 안 되었다. Bright, p. 252. 대상 8:33 절과 9:39 절에서는
“에스바알”로 나와 있음.
34 참조. 그는 레갑과 바아나의 손으로 암살당했음 (삼하 4:5,6). McKenzie, pp. 122-126.
35 참조. Bright, pp. 256-264.
36 요압이 먼저 예루살렘을 정복했음. 참조. 역대상 11:6.
37 대상 11:7,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한 고로 무리가 다윗성이라 일컬었으며”.
38 참조. 삼하 6; 대상 13.
39 다윗은 헤브론에서 칠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 년을 치리하였음. 참조. 역상 29:27.
40 참조. 삼하 7; 대상 14-17 장; 22-26 장. 다윗은 성전 건축의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있음. 그리고
성전예배준비까지도 철저하게 세워놓고 있음.Steussy Marti J, David: Biblical Portraits of Power, ed. James L.
Crenshaw, Studies on Personalities of the Old Testament (Columbia, South Carolin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1999). P. 110-115; “David”, Encyclopaedia Judaica V., p. 1324.
41 대상 22:6-8
42 다윗은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종교적의 영향을 정치적 또는 사회적위치보다 높게 세우려고 하였다.
나라의 통합은 종교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나라가 축복을 받기를
원했다. Kessler. Pp. 88-90.
43 삼하 11 장
44 삼하 11:27. 참조. McKenzie, pp. 153-162.
45 삼하 12:15-23
46 삼하 12:24. 다윗이 홰개하고 얻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주셧다.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임. “Solomon”, Encyclopaedia Judaica XV, p. 96.
47 McKenzie, pp. 160-173.
48 참조. 왕상 1 장. 왕위 계승의 문제는 해결 되지 않았다. 다윗은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자기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 같으나 (13, 17 절) 그러한 것과 관련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이에 늙고
쇠약해 졌다. Bright, p. 269.
49 나단은 선지자요 다윗의 신앙의 충고자였다. 그의 신중성은 솔로몬 왕국의 터를 잡아놓은 것이다.
50 솔로몬은 왕으로 집권통치 동안에 크게 번영을 가져왔다. 종교적으로 초기에는 경건하여 여호와께
인정되었으나, 지혜와 무역에 얻은 막대한 재력으로 장려한 성전과 호와로운 궁전을 짓고 극치적 사치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강석호, p. 286.
51 그의 시대를 황금시대(Golden Age)로 볼 수 있다. Bright, p. 277.
52 성경은 솔로몬의 통치 시대를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고, 다시는 맛볼 수 없었던 평안과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그리고 이것은 평화로은 예술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Bright, p. 277.
53 “Solomon”, Encyclopaedia Judaica XV, p. 106.
54 전도서 12:13. 솔로몬의 자신의 최후의 결론이다.
55 이 무역에서 관한것은 열왕기상 10:28 절 이하에 나와있음. 솔로몬은 자기 군대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 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많은 수량의 병거와 말이 필요했는데, 이스라엘른 병거를 만들거나 말을
기르지 못했던 까갉에 모두 수입해야 했다. 그당시 이집트는 제국시대 이래로 가장 훌륭한 병거를 제작해
왔고 한편 길리기아는 고대에 있어서 가장 좋은 말의 원산지로 유명했다. Bright, p. 277.
56 참조. 왕상 5:1-8:66 (대하 2:1-7:22)
57 Bright, p. 292.
58 에돔 사람 하닷의 적대, 다메섹의 르손의 적대, 여로보암의 반란과 선지다 아히야가 솔로몬을 위협했다.
강석호, pp. 286-88.
59 왕상 12:16.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신복 여로보암의 손을 들어 왕을 대적케 하셨음.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다. 여로보암은 신분이 낮은 자였으나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 공사하는 중에 그의 수완이
인증되었전 자이다. 감독이 된 후 그는 실로 선지자 아히야를 만난 후 반역의 씨를 심게 됨. 선지자에게서
10 지파의 왕이 될것을 예언 받음. 이 사실을 안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난 그는 이집트로 도망함.
그리고 솔로몬이 죽기 까지 이집트에 거하고 있었음( 왕상 11:26-40). 강석호, pp. 287-8.
60 왕상 12:24
61 사마리아는 오므리왕이 설립한 곳이다. 배경은 오므리가 은 두 달란트를 세멜에게 주고 사마리아산을 삼.
그리고 그 산위에 도시를 건축을 하고 이름을 사마이라로 불렀다. 왕상 16:24. “Samaria”, Encyclopaedia
Judaica XIV. P. 723.
62 비록 북쪽땅은 남쪽땅 보다 넒었지만 행정에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특히 북쪽왕국은 반란식의
정권바꿈때문에 행정 조직면에 결핍을 보여주고있다. Kessler. P. 95.
63 Ibid.
64 왕상 12:2
65 여로보암의 가장 뜻 깊은 조치는 예루살렘의 제의에 대항할 만한 공식적인 국가제의를 제정한것이다.
그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의 모든 왕권이 필요로 했던 신학적 합법성의 문제가 그에게 특히
예민하게 부각되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파동맹의 성소의 후신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곳으로 가고자하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Bright, p. 301.
66 A Chronology of the Hebrew Kings, ed. Edwin Thiele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Company, 1977). Pp.
2-53.
67 정복자는 앗수르제국 왕 사르곤 2 세(Sargon II of Assyria)였음. “Samaria”, Encyclopaedia Judaica XIV. P.
724.
68 B.C. 8 세기 말엽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나라가 위기 사태를 끊임없이 외친 선지자들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 이 시대의 유다 역사를 매듭 짓고 넘어갈 수는 없다. 만약 선지자들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
다면, 역사를 대충 살피고 넘어가는 셈이된다. Bright, p. 364.
참고문헌 Bibliography
Bright, John. A History of Israel. 3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1.
Cartledge, Tony W. 1&2 Samuel Smyth & Helwys Bible Commentary, Edited by R. Scott Nash.
Macon, GA: Smyth&Helwys, 2001.
A Chronology of the Hebrew Kings. Edited by Edwin Thiele.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Company, 1977.
J, Steussy Marti. David: Biblical Portraits of Power Studies on Personalities of the Old
Testament, Edited by James L. Crenshaw. Columbia, South Carolin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1999.
Johnson, Paul. A History of the Jews. San Francisco: HarperPerennial, 1987.
Kessler, Rainer. The Social History of Ancient Israel: An Introduction, Edited by Trans. by Linda
M. Maloney. Minneapolis, MInnesota: Fortress Press, 2008.
Long, Philips V. The Reign and Rejection of King Saul: A Case for Literary and Theological
Coherence Sbl Dissertation Series 118. Atlanta, GA: Scholars Press, 1989.
McKenzie, Steven. King David: A Biograph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